▲1969년 당시 신문 기사
진실위 자료사진
배경옥은 간첩방조 혐의로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회상했다.
"사형 선고받았을 때 어머니한테 제일 죄송했습니다. 자식을 먼저 보내야 하는 어머니 마음이 어떠셨겠습니까. 한낱 미물의 생명도 존중해야 하는데 그때 당시 사람 목숨을 너무 중히 여기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 세상에 태어난 생명은 누구나 귀중한 것 아니겠습니까. 새든, 동물이든, 사람이든, 그 누구든 내가 뭘로 태어나야지 작정하고 나온 사람은 없잖아요."
배경옥은 항소심에서 다행히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대법원에서도 같은 형이 확정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당시 그에겐 아내와 어린 아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딸이 있었다. 수감 후 1969년 어느 날, 아내는 갓 태어난 딸아이를 낳아 면회를 왔다. 그러나 둘 사이는 점점 멀어졌다.
당시 박정희 정권하에서 '빨갱이'로 종신형을 받은 남자를 평생 기다리며 싱글맘으로 살라는 것은 여성에게 가혹한 것이라고 배경옥은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사랑하는 여성과의 불가피한 '이별'을 원망 없이 차분히 받아들였다.
한편, 배경옥은 감옥살이 처음 5년은 독방에서 보냈다. 발을 펴면 벽에 닿을 정도의 작은 방이었다. 온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어 겨울밤 그릇에 물을 떠 놓으면 얼음덩이가 되는 감방에서 옥살이를 했다.
추위에 혀가 굳어 말이 안 나온 적도 있었다. 마음 속으로는 말이 되는데 정작 말을 하려니 말이 제대로 안 나왔다. 그때부터 그는 독방의 작은 창문을 향해 미친 사람처럼 독백을 했다. 추위에 혀가 굳게 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혀 운동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배경옥은 무기징역형으로 복역하다가 수감된 지 무려 21년 만인 지난 1989년 12월 22일 감형을 받고 출소했다.
출소하고 나서 무려 21년 만에 배경옥은 아들과 딸을 만났다. 그가 처음 감옥에 갔을 때 엄마와 함께 면회 온 아들은 네 살이었다. 30대, 40대를 감옥에서 다 날려버리고 21년 만에 만난 아들이 배경옥은 너무 반가웠다. 하지만 또 서먹서먹했고 '간첩' 아비를 두고도 건강하게 자란 아들을 보니 너무 미안했다.
21년 만에 만난 아들 그리고 자살
20대 중반 청년으로 자란 아들은 결혼을 앞뒀지만 아버지를 찾지 않았다. 어느 날 아들은 전화를 통해 "그냥 남남처럼 이대로 살면 안 되겠느냐"고 했다. 그것이 배경옥이 들은 아들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그가 석방된 지 9개월 만인 1990년 8월 어느 날 아들은 자살했다. 결혼하면 '간첩의 아들'이라고 처가에서 좋지 않은 소리를 듣게 될까 봐 고민하던 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지난 21년간 아들은 아버지가 죽은 줄 알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간첩' 아버지가 감옥에서 나와 자신을 찾으니, 결혼을 앞둔 아들이 고민을 많이 했던 것같다고 배경옥은 생각했다. 그렇게 먼저 간 아들을 생각하면 배경옥은 지금도 속이 미어진다. 배경옥은 "나는 가족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준 죄인"이라고 말한다.
30~40대의 청춘을 감옥에서 다 보내고 세상에 나온 배경옥의 삶은 만만치 않았다. '간첩'이었던 그가 지구상의 유일한 '냉전' 국가인 대한민국 하늘 아래서 취직할 곳은 하나도 없었다. 그 후 그는 그저 죄 없는 동생들한테 도움받고 신세 지며 근근이 죽지 못해 질긴 목숨을 유지하며 하루살이처럼 살았다. 그리고 지난 2005년 배경옥은 '이수근 사건'이 중정에 의해 간첩사건으로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필자가 한때 몸담았던 진실화해위원회(아래 진실위)에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2006년 배경옥은 진실위에서 1969년 이수근 사건 당시 "(중정의) 수사과정에서 의자에 앉혀놓고 잠 안 재우기, 야전용 전화기에 의한 전기고문, 구타 등의 고문을 당했고, 물고문, 몽둥이 구타, 반복 질문에 의한 암기화 과정을 거쳐 수사기관이 암호문을 조작했으며,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을 입었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진실위는 이수근 사건을 조사하던 중 당시 중정 월남책임자였던 이대용으로부터 "(당시) 김형욱 중정부장에게 '이수근이 간첩이 아니다'라는 말을 직접 들었다. 그리고 이에 대해 보안유지를 부탁받은 바 있다. 이수근이 간첩이 아니라는 것은 당시 중정 안에서는 다 아는 사실이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북쪽이 싫어 내려왔는데 남쪽도 자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