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에게 핸드폰 사용법을 알려주고 있는 박승민.
박승민
"사실, 오늘은 '사랑방마을주민협동회'(마을 은행) 이사회가 있는 날이에요. 원래는 월요일이었는데 갑자기 바뀌어서 오늘 하게 됐지 뭐예요. 인터뷰가 잡혀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결국 회의에 못 간다고 했어요. 사랑방 상황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해요. 반상근으로 채용한다고 해서 왔는데 제때 퇴근할 수 없는 것부터. (웃음)
저는 전교조 세대라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노래를 들으며 살았어요. 대학을 가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공부에 취미도 없었고요. 어렸을 때는 주위 사람들하고 노는 게 즐거웠고, 결혼하고 육아에 전념할 때는 육아밖에 몰랐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 생활하다가 '참교육시민모임'이라는 단체에서 일했어요. 지금은 '사랑방'과 '집' 두 개밖에 몰라요(웃음). '지금'에 충실하며 열심히 사는 게 제 삶의 기준이에요.
사랑방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가난한 삶은 뉴스에서 본 게 다였어요. 여기 와서 처절한 실체를 마주 보게 되었어요. 그리고 배우고 있어요.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고민 하면서요. 제가 오자마자 같이 일하던 활동가가 인수인계도 안 하고 2주일 만에 그만뒀어요. 이유는 자세히 모르지만, 주민대표와 갈등이 있었나 봐요. 할 수 없이 제가 모든 일을 떠맡게 된 거죠. 앞이 캄캄했지만 제가 그만두면 사랑방이 버려지는 것 같았어요.
일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는 일이 이렇게 힘들 거라는 생각을 못 했어요.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좋은 일을 하는 곳 정도로만 생각했어요. 막상 활동해 보니까 아니더라고요. 저도 시민단체 일을 해봤지만, 이곳은 보통의 시민단체와는 다른 곳이에요. 사랑방에서 활동해 보셨으니까 잘 아실 거예요. 눈코 뜰 새가 없어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활동가는 없고, 나이 들고 아픈 주민들은 많고."
나는 사랑방에서 일하면서 인생이 꼬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지금은 돈 걱정을 덜 하지만 당시에는 거의 앵벌이 수준으로 일했다. 2년 동안 뼈를 갈아 넣으며 일했지만 쫓겨나듯이 떠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나온 후에 여러 명의 활동가가 들고 났다. 다들 무슨 생각으로 사랑방에서 일한다고 했는지 모르겠다. 웬만한 꼴통이 아니고서는 선택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생하는 게 싫어서 나간 것 같지는 않다. 주민들과 어떻게 호흡하고 맞춰야 하는지 몰라서 떠났을 거로 추측할 뿐이다. 뼈를 갈아 넣었는데 돌아오는 게 '욕' 아니면 '악담'이니 어느 누가 버틸 수 있을까. 그럼에도 가난한 주민들은 '정'이 넘쳤다. 조금만 도와드려도 그것의 배가 넘는 고마움을 표했다. 평생 마실 술의 2/3를 그때 마셨다. 그 덕에 힘든 걸 잊고 일했는지도 모른다.
"아픈 분들을 모시고 병원에 갈 때가 제일 좋아요. 가족도 없고 돌봐주는 사람도 없는데 몸까지 아프면 얼마나 서럽겠어요. 병원에 가면 많은 환자를 상대하는 의료진이 세심하게 봐주지 않아요. 늙고 가난한 사람이 오면 더 그래요. 의례적인 말만 할 뿐.
그런데 제가 같이 가면 한마디라도 더 해줘요. 한 번 더 쳐다보기도 하고. 왜 그런 줄 알아요? 늙고 남루한 행색이어도 보호자가 있으니까 함부로 못 하는 거예요. 같이 간 주민분도 든든해 하시고. 우리한테는 아무것도 아닌, 핸드폰 사용법을 물으시는 분도 많아요. 사용법을 알려드리면 얼마나 고마워하시는지 몰라요. 저는 여기서 일하면서 마음이 힘든 적은 없어요. 나이를 먹다보니 체력이 달리고 몸이 힘들어서 그렇지."
옷을 어떻게 입느냐에 따라 밥을 얻어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정해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동의하지는 않지만, 겉모습을 보고 사람을 평가하는 습관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의지할 곳 없고, 몸은 아프고, 혼자선 못 가는 병원에 누군가와 함께 간다는 것은 든든한 '빽'이다. 병원에 동행하는 박승민은 흥이 난다. 몸은 힘들어도 일하는 재미가 있는 곳, 그곳이 사랑방이다.
주민들의 '욕받이'가 될 때는 힘들어요
"힘든 점이 있다면 제가 주민들의 '욕받이'가 될 때예요. 이유도 모르는 폭언을 들어야 할 때가 있어요. 고소하거나 같이 싸우기도 어려워요. 누군가 화풀이 대상이 필요할 때 그게 사랑방이 되기도 하고 제가 되기도 하는 거죠. 그 일을 마음에 담아두면 저도 병이 생기겠죠. 그래서 받는 즉시 날려 버려요. 어디다 날리는지는 비밀이고요(웃음).
작년에 제가 좋아하는 주민 한 분이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했었어요. 그때 정말 마음이 힘들었어요. 주민운동 교육을 받고 수료하는 날이었는데 많은 주민이 축하해 주러 오셨고, 그분도 오셨어요. 그런데 다음날 건강이 악화되셔서 바로 입원하셨어요. 죄송했어요. 저는 사랑방에서 일하면서 매일매일 보람을 느껴요. 어디 가서 이런 경험을 해 보겠어요? 학교에서도 배울 수 없는 걸 여기서 다 배우고 있죠(웃음)."
주민들의 욕받이가 되어도 매일 보람차다는 박승민의 얼굴에는 행복한 웃음이 가득했다. 사랑방에는 점심 한 끼를 천 원 주고 먹는 밥상공동체 '식도락'이 있다. 코로나19(이하 코로나) 때문에 지난 2월 말부터 3월 말까지 한 달 동안 문을 닫았다. 박승민은 그때 마음이 많이 아팠다고 한다.
지역의 복지시설도 하나둘 문을 닫자, 거동이 불편한 분들은 끼니를 해결하기 힘들었다. 승민씨와 주민들은 식도락에서 도시락을 만들어 주민들께 나눠주는 것으로 지혜를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