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8월 근정전에 일장기가 걸린 사진. 인터넷 등에서 흔히 보는 이 사진에 필자가 포토샵으로 일장기를 빨갛게 색칠했다.
정만진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이후를 산 우리나라 사람들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일제와 싸웠거나, 친일파로 일제에 빌붙었거나, 그 중간쯤에 머무르는 '보통 사람(주1)'으로 살았다.
독립운동에 투신한 항일지사들도 외교독립론, 실력배양론, 군사전쟁론, 의열투쟁론 등 노선에 따라 서로 다른 방법으로 일제와 맞섰다. 그 과정에서 소중한 목숨을 잃는 분들이 생겨났다. 우리는 그들을 '순국(殉國) 지사'라 부른다. 殉이 '따라 죽다'이므로, 순국은 나라를 구하려고 애쓰다가 자신도 나라의 뒤를 따라 죽었다는 뜻이다.
순국 지사의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의사(義士)는 직접 무기를 들고 전투나 의협 투쟁을 벌이다가 세상을 떠난 분들이다. 열사(烈士)는 총칼 없이 일제에 맞서다가 생명을 잃은 분들이다. 열사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주 자강의 의지를 천하에 밝힘으로써 본인의 자존도 지키고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독립 의기도 북돋운 '자정 순국' 지사들도 있다.
국어사전에 실려 있지 않은 '자정'이란 낱말
자정(自靖)은 국어사전에 나오지 않는다. 自는 우리말에서 '스스로', 靖은 '편안하다, 평안하다, 안정시키다, 평정하다, 다스리다' 등에 해당된다. 글자 그대로 읽으면 '자정 순국'은 스스로를 편안하게 만들기 위해 나라를 따라 죽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이상한 해석이다. 이는 자정이라는 낱말이 무엇인가를 에둘러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자살(自殺)은 스스로(自)를 죽였다(殺)는 직설적 표현이고, 자결(自決)은 스스로(自)의 삶을 끊었다(決)는 우회적 표현이다. 이에 견주면, 자정은 자결을 좀 더 순국에 어울리게 나타내기 위해 창조된 신조어이다.
하지만 '자정'이라는 말까지 만들어가며 일제에 저항했던 선조들에 비해 우리 후대인들의 독립운동정신 계승 노력은 너무나 미미하다. 경술국치를 기억해야 다시 그같은 국가적 치욕을 당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할 수 있고, 독립지사들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경술국치를 기리는 국가적 행사도 갖지 않고, 추념일 지정도 않으며, 관청들도 겨우 한다는 것이 '조기 게양 독려' 수준이다.
경술국치 맞아 돌이켜보는 순국 열사들
그렇다고 그 탓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나부터 무엇인가를 실천해야 한다. 그것이 언행일치의 선비정신이다. 필자는 8월 29일 경술국치(庚戌國恥) 일을 맞아 19 10년(庚戌) 당시 나라(國)를 빼앗긴 부끄러움(恥)을 자정의 방법으로 밝힌 순국 지사들을 두루 살펴보는 것으로 스스로의 마음을 가다듬으려 한다.
경술국치 자정 순국 지사 중 한 분인 이범진(李範晋) 선생을 독자들께 소개한다. 1905년 을사늑약 전후부터 1910년 경술국치 이후까지 "일제 침략에 항거하여 전국에서 1910년 이전에 10명이, 1910년대에 56명이 자결하였다."(주2) 지면 부족으로 이 분들을 모두 알리는 일은 가능하지도 않지만, 무엇보다 필자의 준비 부족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차근차근 챙겨왔으면 경술국치를 맞아 모든 자정 순국 열사들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었을 텐데…….' 하고 반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