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 춘추공원에 있는 윤현진 선생의 흉상양산 춘추공원에 있는 윤현진 선생의 흉상
이병길
윤현진은 양산군 상북면 소토리에서 1892년 10월 17일(음, 9월 16일) 태어났다. 15세 되던 1907년 숙부 윤상은과 윤명은, 구포 객주 장우석 등이 설립한 사립구명학교(현 구포초등학교) 1회를 졸업하였다. 이 학교는 나중에 백산 안희제가 교장을 하였는데, 2・8독립선언에 참여한 양산 상북면 출신 김철수도 3회, 부산대학 교 초대 총장 윤인구는 4회 졸업생이다.
윤현진은 1908년 기장군수를 한 엄신영의 딸 엄정자와 결혼을 한다. 장인의 동생은 엄우영으로 양산 3・1운동의 주역 엄주태의 부친이다. 윤현진은 그 후 서울 배제중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다가 그의 형 윤현태와 함께 1909년 중국 상해로 유학을 갔다. 상해에서 영어를 배우고 안창호, 김택영, 유동열, 조성환 등과 연락하고 잡지 <소년>의 편집에 종사하다가 여동생 윤덕경과 현정건(독립운동가로 민족유일당 운동을 했으며, 소설가 현진건의 형)의 결혼으로 1910년 귀국을 하였다. 8월 국권피탈 이후, 그는 경제활동과 교육운동을 통해 동지를 규합하려고 노력하였다.
22살 때인 1914년 일본 동경의 명치대학교 법학부에 입학하여 유학생학우회 총무를 하며 잡지 <학지광> 발간에 참여하였으며, 제국주의 타도와 민족해방을 표방한 '신아동맹당'에서 활동하였다. 1916년 유학 2년 만에 학교를 중퇴하고 귀국을 하고, 국내에서 비밀결사 단체인 '대동청년단'에서 활동하였다.
1909년 파평 윤씨 집안 주축으로 설립한 구포저축주식회사는 구포은행으로, 1915년 경남은행으로 발전하여 민족 자본가들의 금융 창구 역할을 한다. 윤현진은 구포저축 초기 최대 주주였다. 부산의 백산무역(주)은 형 윤현태, 숙부 윤상은, 백산 안희제, 경주 최준 등이 출자한 회사로 민족 자본가들의 회사였다. 윤현태는 백산무역의 대주주였다. 두 형제가 관계한 은행과 무역회사는 민족자본의 대일 항전 기관이었다.
윤현진은 1919년 경남은행 마산지점장을 하다가, 같은 해 4월 남형우와 함께 상해에 가서 임시정부 수립에 힘을 쓰고 재무차장으로 활동을 한다. 당시 형 윤현태는 조선독립운동비로 수만 엔을 임정에 제공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윤현진은 법무차장 남형우, 양산 출신의 학무(외무)차장 이규홍과 함께 임시정부 차장 정치의 중심에 있었다.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포하고 독립운동의 변화를 모색하는 가운데 임정의 실세 차장들은 이승만 대통령 불신임 운동을 한다. 사직서를 제출하는 등 압박을 하지만 안창호의 거부로 결국 이루지 못한다. 훗날 1925년 3월 11일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이승만 대통령 탄핵안을 의결한다. 최초의 대통령 탄핵이었다.
당시 임정에는 실력양성론, 무장투쟁론, 외교론 등으로 갈등하고 있었다. 윤현진은 재무차장으로 임정의 살림살이에 전력하면서 그는 여러 갈래로 갈라진 독립운동을 원만히 진행할 유일한 방법이 국민회의 회의 소집이라 보고 상해 임정 개조에 진력하기 위해 사임하였다. 임정의 통일 운동에 앞장섰던 윤현진은 죽음의 문턱에 있으면서도 가장 한스럽게 생각한 것은 우리 민족에게 대단합 대단결이 결여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