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전마을 입구 마을입구에 들어서기 전 만나는 표지석이다.
박기철
추석을 앞두고 순천시 낙안면에 있는 신전마을을 찾았다. 이 마을은 1948년 10월 19일에 발생한 여순사건에 휘말려 비극을 겪었다. 그 이후로 소위 '추석 없는 마을'이라고 불리며 수십년 동안 추석이라는 명절을 마음 편히 누리지 못했다.
1949년 10월 8일, 그날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위치한 제14연대 병사들이 제주도(4.3사건) 토벌 명령을 거부하며 무장 봉기한다. 우리가 익히 들어본 여순사건이었다. 무장대는 여수와 순천을 비롯해 벌교와 남원 등 인근 지역까지 진출한다.
하지만 10월 27일 진압군이 여수를 탈환한다. 그렇다고 사건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14연대 남은 병사들은 인근 지리산 등지로 입산하여 빨치산 활동을 이어나갔다. 이 기간 전후로 수많은 주민들이 무장대와 토벌대 사이에서 희생되었고 삶의 터전이 파괴되었다.
그중에서도 신전마을 사건은 여순사건의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로 알려져 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보고서뿐 아니라 여순사건 관련 다양한 책에서도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2국에서 작성한 '순천지역 여순사건' 보고서를 중심으로 다른 책의 기술을 참고해 사건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949년, 조용했던 신전마을에 빨치산 무장대가 들이닥친다. 그들은 허벅지에 총상을 입은 한 소년을 마을 사람들에게 맡긴다. 승주읍(당시 쌍암면) 남정리 출신의 문홍주(14세)라는 소년이었다. 무장대는 소년의 부상을 치료해주라고 협박했다.
주민들은 위협이 두렵기도 한 데다 부상 당한 어린 소년을 모른 체 할 수 없어서 받아들인다. 그리고 밥도 주고 상처도 돌봐준다. 그렇게 그 소년은 마을 사람들의 보살핌 덕에 점차 회복되었다.
소년은 상처가 아물자 승주읍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할아버지를 만나러 길을 나섰다. 그러다 인근 마을 아이들과 시비가 붙었다. 이 와중에 소년이 '우리 무리'들을 데리고 와서 혼내 주겠다는 말을 한다.
여기서 우리 무리란 바로 빨치산 부대를 가리킨다. 우연히 근처를 지나던 면서기 서정수가 이 말을 듣고 소년을 붙잡아 경찰서에 넘긴다. 토벌대 15연대는 소년을 취조하여 신전마을에서 있었던 일을 알아낸다.
그해 10월, 마을에 군인들이 왔다. 군인들은 마을 사람들을 모두 마을 공터에 모았다. 그리고 그 소년을 개머리판으로 때리면서 부역자들을 지목하게 했다.
이미 조사 단계에서부터 고문을 당했던 소년은 겁에 질려 손가락으로 마을 사람들을 하나씩 지목했다. 소년이 지목한 사람들은 그 소년에게 밥을 지어주고, 잠자리를 내주고, 간식으로 홍시를 줬던 이들이었다. 군인들은 이들을 빨치산 부역자로 규정했다.
군인들은 소년이 지목한 사람들을 동네에서 가장 큰 집 마당으로 끌고가 총을 쏘았다. 그리고 시신들 위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다. 그 다음에는 마을 집집마다 처마 밑에 불을 놓았다.
30여 가구의 작은 마을에서 이 날 희생당한 사람만 22명이었다. 그 중에는 4살 이하 어린 아이 3명과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도 있었다. 순식간에 마을은 죽음의 냄새로 가득 찼다. 시신 타는 냄새가 사리지지 않아 주변 동네 사람들은 한동안 멀리 돌아서 다니기도 했다. 당시 일부 군인들도 자신들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며 걱정했다고 한다.
군인들이 물러간 후 시신을 수습하려 해도 한데 모아서 불태운 시신의 형태가 온전할 리 없었다. 가락지나 비녀 등으로 겨우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신을 거둬서 묻으려고 해도 삽 한 자루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마을 전체가 잿더미였다. 결국 이웃 마을 사람들이 와서 시신 매장을 도와주었다.
이 때가 추석 직후인 10월 8일(음력 8월 17일)이었다. 이 날 이후로 이 마을에서 추석은 악몽이 되었고, '추석 없는 마을'이 되었다(진실화해위원회의 보고서에는 음력 8월 17일로 나와 있지만, 일부 자료에서는 8월 16일로 나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