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 심씨 만석꾼의 자손 심재오 씨는 "돈이란 의미 있는 일에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라고 말한다.
홍성식
청송 심씨(靑松 沈氏) 심처대의 집안은 조선 영조(재위 1724~1776) 때부터 20세기 중반까지 9대를 이어간 '만석꾼'이었다. 단순히 만석꾼이라 하면 어느 정도의 재산을 가진 것인지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한 번 살펴보자.
전통 도량형에 따르면 쌀 만 석은 1440t이다. 이 정도 양의 벼농사를 지으려면 최소 80만 평의 땅이 필요하다. 서울 여의도 면적 1/3에 해당하는 무시무시한 넓이.
일제강점기였던 1930년 조사에 따르면 당시 만석꾼은 지금의 남한과 북한을 통틀어 40명이 되지 않았다. 상위 0.000001%의 부자인 셈이다. 이제 대충이나마 감이 올지 모르겠다.
예전에 청송과 안동을 비롯한 영남 북부에선 이런 말이 떠돌았다.
"날아가는 새라면 모를까, 청송에서 남북 100리를 가면서 심부자댁 땅을 밟지 않을 방법은 없다."
세상엔 고약한 부자도 적지 않다. 집에 10kg이 넘는 금괴와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명품 가방 여러 개, 수억 원의 현금을 숨기고 살면서도 세금을 내지 않으려 위장이혼을 하고, 아버지의 무덤에 풀이 마르기도 전에 경영권을 두고 재벌 남매와 모자가 다투는 경우를 신문 지상이나 TV 화면을 통해 보는 게 요즘 세태다.
청송에서 살던 어떤 '양심적 부자' 이야기
그렇다면 청송 심부자 집안 사람들은 어땠을까? 아래 문헌을 통해 드러난 몇몇 기록을 잠시 소개한다.
고종 31년(1894)을 전후해 나라에선 "이제부터 은화로 세금을 납부하라"는 칙령을 내린다. 만석꾼이었던 심호택이 짊어져야 할 납세의 의무는 엄청났고 또한 무거웠다.
그러나 꼼수를 쓰거나 두루뭉술하게 넘어가지 않았다. 가졌던 논과 밭을 상당 부분 팔아 은화를 마련했다. 의성에서 청송으로 은화를 운반하는 행렬이 족히 3~4km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는 내야 할 세금을 회피하지 않는 정직한 사람이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전국에서 의병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경상도도 마찬가지. 이때 청송 일대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눈을 피해 알게 모르게 가장 많은 군자금을 의병에게 전달한 게 심호택이었다는 걸 부정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심호택은 신상의 위협을 감수하면서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일본에서 도입한 차관을 한국인이 갚자는 국민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심호택의 아들과 손자였던 상원과 운섭은 1945년 해방 이후 자신이 소유한 땅의 적지 않은 부분을 소작농들에게 나눠주는 파격적 행보를 보여주기도 했다.
지식인의 최고 가치는 앙가주망(engagement)이고, 부자들의 최종 지향점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가 돼야 하지 않을까?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 사이에 보여준 청송 심씨 일가의 행위는 앙가주망과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동시에 실천한 희귀한 사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