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하게 헤어지는 방법이은정 작가
마음서재
책 <완벽하게 헤어지는 방법>의 표지를 처음 본 순간 굴곡지고 고단한 삶을 일찌감치 체험한 젊은 여자의 마음이 조금 느껴졌다.
IMF 구제금융 이후 한국사회는 국가적으로는 부도사태를 간신히 탈출했으나 사회적으로는 중산층의 붕괴와 양극화의 심화라는 후유증을 낳았다. 이 후유증은 잦아들기는커녕 이어진 국내외의 여러 큰 사건들과 금융, 부동산 사고를 통해, 심지어는 예측이 쉽지 않는 전지구적인 감염병 사태까지 번져 긴 시간 많은 이들에게 직간접의 상처를 주고 있다.
이은정 작가의 소설집 <완벽하게 헤어지는 방법>에 나오는 인물들은 2000년 이전이라면 경제적 하위계층 혹은 심신이 유달리 남다르거나 힘든 이들의 특별한 소재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을 읽은 대부분의 독자들은 느낄 것이다. IMF 이후로는 이 등장인물들의 이야기가 이젠 더 이상 먼 나라 얘기거나 다른 사회 얘기가 아니라 나의 얘기이거나 가족, 친척 혹은 이웃들의 이야기임을. 최소한 나의 친구들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이 소설집은 우연히 친구에게 엮이게 된 사건을 다룬 <잘못한 사람들>, 가족들로부터의 탈출 혹은 자유를 꿈꾸는 <완벽하게 헤어지는 방법>, 물에 빠진 사람 구해주다 발생하는 이야기인 <그믐밤 세 남자>, 이혼의 쓰라린 현실을 다룬 <피자를 시키지 않았더라면>, 정직하지 않은 어른들이 아이에게는 정직함을 요구하는 <친절한 솔>, 며느리가 숨어 살고 싶었으나 정작 시어머니가 숨어 버린 <숨어 살기 좋은 집>, 작가를 꿈꾸는 남녀의 애환을 다룬 <엄 대리>, 밧줄을 풀고 자유롭게 사는 강아지를 통해 삶을 비춰보는 <개들이 짖는 동안> 등 여덟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소설집의 이야기들은 독자들이 보기에 암울하거나 슬프거나 부조리하다. 혹은 미스터리하거나 미처 이해를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인물들은 살아가고 삶은 흘러가고 독자들은 느낄 것이다. 실존의 부조리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까뮈의 이방인에서 그런 것처럼 뫼르소의 눈에 비친 강렬한 태양빛 때문에 살인했던 부조리는 과거의 이야기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적인 차이가 있을지언정 등장인물 모두가 경제적으로 쉽지 않거나 심신이 불안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서로에게 도움이 필요한 존재들이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으로 보자면 이 책은 <힘든 사람들>이란 부제를 붙여도 무방할 것이다.
이은정 작가는 소설을 통해 쉽게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생활정보지를 폐지로 주워가는 바람에 생계가 위협받게 된 남자가 할머니를 폭력하는 장면에서의 하늘은 세상을 살펴주는 존재가 아니라 불을 붙여버리고 싶은 연탄같은 하늘이다(잘못한 사람들, p.22).
세상의 좋은 점을 경험하고 인간적인 덕목을 배워야 할 어린이는 어른들의 가식, 위선, 계산을 먼저 터득하고 마는 생존법에 길들여진다(친절한 솔). 육신으로부터 결별이, 마음과 기억으로부터의 결별이 아니라 트라우마로 잠재의식 속에 잠시 묻어둔다는 것을 모르거나 외면한 채로 완벽한 이별이 시작되었다고 믿고 싶어한다(완벽하게 헤어지는 방법, p.68).
한편으로 삶은 부조리하거나 미스터리한 것이다. 할머니를 죽이는 사람은 친구인데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은 나다. 정말 잘못한 사람들은 혹은 이렇게 된 환경은 도대체 누구 때문인가(잘못한 사람들). 공황장애 등으로 인적드문 곳에서 자신을 잘 챙겨주는 남편과 조용히 살고 싶은 것은 며느리인데 그것을 사사건건 간섭하고 틈입하는 시어머니가 오히려 더 바로 옆 조용한 곳에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존재로 있고 싶어 한다(숨어 살기 좋은 집).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이 이어지는 한, 희망의 빛은 아주 조금씩 비춰진다. 그믐밤 해안가에서 나와 태수 아버지와 물에 빠질 뻔한 남자는 서로에게 쌓였거나 궁금했던 사연들을 풀어 가면서 인간과 삶에 대한 이해가 한 뼘은 넓어진다(그믐밤 세 남자). 남자는 작가가 되기를 바랐지만 혹은 작가를 계속 꿈꾸기를 바랐지만 그 희망을 잃은 뒤 헤어졌던 남녀가 로또맞은 것 같은 우연한 기회로 다시 재회할 가능성을 남겨두기도 한다(엄 대리).
이 소설집의 소재는 이 시대에 존재하는 적지 않게 많아진 힘든 계층들의 이야기이다. 그렇기에 많은 독자들은 이 이야기들이 자신들의 것인양 공감하고 위로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조금 더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소재주의의 알레고리에 빠지지 않고 넓고 높은 시선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의 마지막은 크게 '발광'을 하거나 침묵을 지키는 것처럼 그믐달이 초승달보다 날카롭다'는 구절(그믐밤 세 남자, p.92)처럼 혹은 제일 위의 인용글처럼 작가의 시선은 별과 달을 포기하지 않고 '의식한다'.
이야기의 소재를 소재에 머무르지 않게 바라보며 삶의 통찰과 세계의 시선이 번득이는 구절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그렇기에 앞으로도 더 넓고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되 긴장감과 진정성을 잃지 않는 시선을 향해갈 수 있다면 작가 미래의 한계조차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게오르그 루카치가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언급했던 시절은 아니겠지만, 별과 달의 존재를 마냥 이쁘게만(?) 볼 수 있는 시절은 아니지만, 그것이 존재하는 한 그 존재로부터 시선을 거두지 않는 마음은 얼마나 충만한가.
작가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개들이 짖는 동안>에 나왔던 강아지 '덕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료를 안정적으로 받아먹고 외부인의 침입을 막으며 밧줄에 묶여 지낼지, 새로운 모험과 위험이 상존하지만 자유를 위해 밧줄을 끊고 뛰쳐 나갈지.
결국 모든 작가들은 소포클레스의 후배이며, 작중 인물들은 오이디푸스의 후예일 것이다. 운명을 예측할 수 없는 부조리한 삶이 이어짐에도 불구하고 실존을 포기하지 않은 존재의 자기존엄은 찬란하다. 치열한 작품을 남기기 위해서 치열한 삶을 살지 않기란 오히려 쉽지 않은 일이다.
화가인 프리다 칼로가 온갖 사고와 역경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모델로 위대한 작품을 남겼던 것처럼 삶의 대가와 작품을 맞바꾸는 운명의 장난은 의외로 자주 일어난다. 왜 태어났는지, 언제 태어나고 싶은지도 결정할 수 없는 - 혹은 원초적인 기억이 봉인된 - 삶은 언제 떠나는 지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원초적으로 비극적이다.
그러나 지금 살아가는 실존의 모습을 이은정 작가처럼 작품으로 증언한 존재는 훗날 자신을 배태한 자연에게 혹은 신에게조차 하소연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나라는 실존으로부터 출발했으되 세계를 담고자 했으므로, 육신에 갇혀 있었으되 별을 보며 살았느라고.
완벽하게 헤어지는 방법
이은정 (지은이),
마음서재,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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