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확산세가 수그러들지 않고 있는 가운데, 11일 서울 서대문구 홍제천 연가교 위치한 체육시설이 코로나19 감염예방을 위해 잠정 폐쇄된 모습.
유성호
청소기를 다 돌리고 잠시 침대에 누워 한숨 돌리려는데, 남편에게서 갑자기 카톡이 온다.
"세탁기에서 지금 세탁물 빼."
어라, 남편이 회사에서 집에 있는 날 보고 있나? 순간 어리둥절했지만 곧 깨달았다. 그가 휴대폰 앱에서 기기 사용 알림을 보고 알았다는 것을. 세탁기, 건조기, 식기세척기, 스타일러 등 우리 집 가전들은 모두 남편에게 내가 집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또 다음 할 일은 뭔지를 알려주고 있다.
퇴사 뒤 온전히 나만의 하루를 보내려는데, 집 안에서의 나의 동선이 남편에게 이렇게 실시간으로 보고돼 일거수일투족을 알수 있다니. 혼자 있어도 혼자 있는 게 아닌 것 같은, 감시당하는 듯한 느낌이다. 게다가 코로나로 인해 남편은 일주일에 2~3번은 재택근무를 하다 보니, 퇴사 뒤 '로망'이었던 혼자만의 시간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은 데도 말이다.
퇴사 전 늘 떠올리던 말, '내가 퇴사만 하면...!'
사실 퇴사 전엔, 직장을 그만두면 하고 싶은 일이 참 많았다. 그때는 지금 내 모습처럼, 휴대폰 앱의 감시 아래 집안일만 하면서 집에만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퇴사 기념으로 장기간 여행도 가고 싶었고, 전시회에 다니고 공연도 보러 다니고 싶었다. 매일 SNS에서 보기만 하던 예쁜 카페에 찾아다니면서 여유를 만끽하고, 사진을 찍으면서 '인스타 감성'이라는 유행에도 따라가고 싶었다.
'퇴사만 하면', 그간 바쁘다는 핑계로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도 만나고, 다음날 출근을 생각하지 않고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려고 했으며, 최신 영화들도 그때 그때 섭렵하고 싶었다. 매일 아침마다 알람 소리에 '회사 가기 싫다'라고 외치던 그 매일 매일의 소원대로, 알람 소리 없이 그냥 내 몸의 상태에 따라 자연스럽게 기상하고 싶었다. 느지막하게 일어나 도서관에 가서 좋아하는 책을 잔뜩 읽고 싶었다.
'퇴사만 하면', 매일 회사를 퇴근한 뒤 녹초가 된 몸 대신, 규칙적으로 헬스장에서 열심히 운동해서 그동안 잃어버린 건강과 몸매도 되찾고 싶었다. 월급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 없던 내가 그리도 부러워하던 일상이었다.
'퇴사만 하면', 회사 하나만 그만두면 다 내가 누릴 수 있는 삶이라고 생각했다.
퇴사 뒤 하고픈 게 많았는데... 코로나가 올 줄은 몰랐네요
그런데 하필이면, 코로나 시대의 백수라니.
지금은 해외여행은커녕, 집 근처 카페에 앉아서 커피 한 잔 혼자서 마실 수 없는 시기,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야 하는 시기다.
그 탓에 도서관이며 헬스장이며, 꿈꿨던 것들 중 아무것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렇게나 꿈꾸던 백수 생활을 집 안에서만 해야 하는 것이, 받지 못하는 월급보다도 더 아쉬웠다.
생각해보라. 회사에 다니지 않는 것의 장점은, 돈을 벌지 않는 대신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로 소모하는 시간과 체력을 아껴, 하고 싶은 일들로 하루를 가득 채우는 하루를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필 코로나로 인해 요즘 겨우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루 종일 '집콕'과 잠시 산책하는 것 정도였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교류할 기회는 퇴사 이전보다 더 줄어들었다.
허탈한 웃음이 나오지만... 그러나 단점 뒤에는 언제나 장점이 숨어 있게 마련이다.
왜 하필 내가 백수일 때 이런 일이 터지는지 내심 원망이 들던 어느 날. 정부가 아주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권고하던 날. 타인의 재능을 교육콘텐츠로 집에서 휴대폰으로 배울 수 있는 '탈잉'과 '프립'과 같은 어플리케이션이 많아지고, 유튜브 등에서 몇 달 사이에 예전보다 훨씬 다양하고 많은 콘텐츠가 쏟아져 나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거리의 제약, 시간의 제약이 없이 오히려 더 많은 교육과 콘텐츠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