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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 코로나 시대에 백수가 됐다

[경험담] '이놈의 코로나' 덕에 내가 배운 것들

등록 2020.12.12 18:03수정 2020.12.14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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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 확산세가 수그러들지 않고 있는 가운데, 11일 서울 서대문구 홍제천 연가교 위치한 체육시설이 코로나19 감염예방을 위해 잠정 폐쇄된 모습.
코로나 확산세가 수그러들지 않고 있는 가운데, 11일 서울 서대문구 홍제천 연가교 위치한 체육시설이 코로나19 감염예방을 위해 잠정 폐쇄된 모습.유성호
 
청소기를 다 돌리고 잠시 침대에 누워 한숨 돌리려는데, 남편에게서 갑자기 카톡이 온다.


"세탁기에서 지금 세탁물 빼."

어라, 남편이 회사에서 집에 있는 날 보고 있나? 순간 어리둥절했지만 곧 깨달았다. 그가 휴대폰 앱에서 기기 사용 알림을 보고 알았다는 것을. 세탁기, 건조기, 식기세척기, 스타일러 등 우리 집 가전들은  모두 남편에게 내가 집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또 다음 할 일은 뭔지를 알려주고 있다.

퇴사 뒤 온전히 나만의 하루를 보내려는데, 집 안에서의 나의 동선이 남편에게 이렇게 실시간으로 보고돼 일거수일투족을 알수 있다니. 혼자 있어도 혼자 있는 게 아닌 것 같은, 감시당하는 듯한 느낌이다. 게다가 코로나로 인해 남편은 일주일에 2~3번은 재택근무를 하다 보니, 퇴사 뒤 '로망'이었던 혼자만의 시간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은 데도 말이다.

퇴사 전 늘 떠올리던 말, '내가 퇴사만 하면...!'

사실 퇴사 전엔, 직장을 그만두면 하고 싶은 일이 참 많았다. 그때는 지금 내 모습처럼, 휴대폰 앱의 감시 아래 집안일만 하면서 집에만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퇴사 기념으로 장기간 여행도 가고 싶었고, 전시회에 다니고 공연도 보러 다니고 싶었다. 매일 SNS에서 보기만 하던 예쁜 카페에 찾아다니면서 여유를 만끽하고, 사진을 찍으면서 '인스타 감성'이라는 유행에도 따라가고 싶었다.


'퇴사만 하면', 그간 바쁘다는 핑계로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도 만나고, 다음날 출근을 생각하지 않고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려고 했으며, 최신 영화들도 그때 그때 섭렵하고 싶었다. 매일 아침마다 알람 소리에 '회사 가기 싫다'라고 외치던 그 매일 매일의 소원대로, 알람 소리 없이 그냥 내 몸의 상태에 따라 자연스럽게 기상하고 싶었다. 느지막하게 일어나 도서관에 가서 좋아하는 책을 잔뜩 읽고 싶었다.

'퇴사만 하면', 매일 회사를 퇴근한 뒤 녹초가 된 몸 대신, 규칙적으로 헬스장에서 열심히 운동해서 그동안 잃어버린 건강과 몸매도 되찾고 싶었다. 월급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 없던 내가 그리도 부러워하던 일상이었다.


'퇴사만 하면', 회사 하나만 그만두면 다 내가 누릴 수 있는 삶이라고 생각했다.

퇴사 뒤 하고픈 게 많았는데... 코로나가 올 줄은 몰랐네요

그런데 하필이면, 코로나 시대의 백수라니.

지금은 해외여행은커녕, 집 근처 카페에 앉아서 커피 한 잔 혼자서 마실 수 없는 시기,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야 하는 시기다. 

그 탓에 도서관이며 헬스장이며, 꿈꿨던 것들 중 아무것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렇게나 꿈꾸던 백수 생활을 집 안에서만 해야 하는 것이, 받지 못하는 월급보다도 더 아쉬웠다.

생각해보라. 회사에 다니지 않는 것의 장점은, 돈을 벌지 않는 대신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로 소모하는 시간과 체력을 아껴, 하고 싶은 일들로 하루를 가득 채우는 하루를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필 코로나로 인해 요즘 겨우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루 종일 '집콕'과 잠시 산책하는 것 정도였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교류할 기회는 퇴사 이전보다 더 줄어들었다.

허탈한 웃음이 나오지만... 그러나 단점 뒤에는 언제나 장점이 숨어 있게 마련이다.

왜 하필 내가 백수일 때 이런 일이 터지는지 내심 원망이 들던 어느 날. 정부가 아주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권고하던 날. 타인의 재능을 교육콘텐츠로 집에서 휴대폰으로 배울 수 있는 '탈잉'과 '프립'과 같은 어플리케이션이 많아지고, 유튜브 등에서 몇 달 사이에 예전보다 훨씬 다양하고 많은 콘텐츠가 쏟아져 나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거리의 제약, 시간의 제약이 없이 오히려 더 많은 교육과 콘텐츠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코로나로 집밖을 나설순 없지만, 독서와 커피가 함께하는 슬기로운 집콕생활을 하게 됐다. 내 취향으로 가득채운 하루를 보내려한다.
코로나로 집밖을 나설순 없지만, 독서와 커피가 함께하는 슬기로운 집콕생활을 하게 됐다. 내 취향으로 가득채운 하루를 보내려한다.남윤아
 
이런 저런 곳에 쌓인 다양한 콘텐츠들을 보면서, 내가 평소에 관심 있었던 분야 외에도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전엔 평생 배워볼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인스타그램 마케팅이나 글쓰기 수업 등을 보며 설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공급에 의해 창출되는 수요를 경험하게 되었고, 그간 알지 못했던 나 자신의 흥미나 취미를 발견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이놈의 코로나' 덕에 내가 배운 것들

단점이라고만 생각했던 집콕 생활이, 오히려 집 안에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괜찮은 비대면 콘텐츠들을 많이 접하고 배울 기회가 되었다. 그러면서 내가 이런 것에도 관심을 보이는구나 느끼며 나를 더 알아갔다.

관점을 바꾸니 원망 속에 숨겨져 있던 희망이 나타났다. 시각을 바꿔 긍정적으로 바라보려 노력하니, 코로나 시대에도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집에서 독서하는 시간도 늘고, 평소에 시간 내서 하려고 생각하지 않았던 명상도 하게 되었다. 운동도 다양한 콘텐츠들이 어플에 담겨있어 오히려 내 몸에 더 잘 맞는 콘텐츠를 고를 수 있게 되었고, 언제든 따라만 하면 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놈의 코로나' 덕에, 겨우 산책밖에 할 수 없는 시기라 어쩔 수 없이 나간 산책길에서 이전 출퇴근 시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한다. 가을과 겨울, 계절감을 물씬 느낄 수 있는 나무, 풀, 하늘... 이전엔 바쁘기만 했던 출퇴근길이 산책길로 바뀌니 비로소 보이고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평소라면 보지 않았을 것들에 새삼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산책길 출근길이 산책길이니 되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예쁜 길이, 하늘이 옆에 있었다니.
산책길출근길이 산책길이니 되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예쁜 길이, 하늘이 옆에 있었다니. 남윤아
 
사람들을 만나며 알게 모르게 그들에게 맞추고자 했던 에너지를, 이제는 자연이나 나 자신에게로 돌리고 나니 소진되었던 무언가가 채워지는 느낌이 난다.

'왜 하필 이런 시기에 백수가 되었나' 하는 원망을 내려놓으니, 타인이 주는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된 지금이 너무도 안전하게 느껴진다. 코로나19 바이러스보다 더 해로운 무언가들로부터 보호받는 집콕 생활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코로나로 인해 아쉬운 점도 당연히 많지만, 코로나 탓에 다치는 사람들은 매우 안타깝지만... 그래도 우리 좋은 점을 바라보려고 조금만 노력해보면 어떨까. 타인의 눈치보다는 나 자신 스스로와 더 소통하는 기회를 가지고, 코로나 시대의 콘텐츠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발견하면서 지금의 어려운 시기를 잘 헤쳐나갔으면 좋겠다.

"어떤 사람들은 비가 올 때를 대비하여 철저히 준비하느라, 오늘의 햇빛을 즐기지 못하고 있다"라는, 윌리엄 페더의 이 문구를 다짐하듯 외워 본다. 나도, 이 글을 읽는 그대도, 시선을 돌려 지금을 조금 더 즐겨볼 일이다.
#퇴사 #코로나 #백수 #거리두기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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