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물오름 능선말굽형 분화구인데, 큰 능선 두개가 중심이다.
신병철
분화구 터진 쪽으로 내려갔다가 건너쪽 능선으로 올라간다. 산방산이 바당 쪽에 자리잡고 있다. 멀리 보이지만, 사실은 가깝다. 형제섬도 자세히 보면 보인다. 건너쪽 능선이 중심 능선인가 보다. 산불감시초소도 그 능선에 있다.
원물오름 안내판은 우리가 가 보지 못한 남쪽 입구에 있다.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아 원물오름의 유래를 찾았다. 동광리는 예나 지금이나 교통의 요지였나 보다. 지금도 평화로와 1116번 도로가 교차하고 있고, 그 옆에 동광6거리가 있다. 5거리까지는 들어봤는데, 6거리가 있음은 처음 알았다. 6거리 로타리는 지금도 교통량이 엄청났다. 도시도 아닌 시골에 그렇게 차가 많다니! 그래서 일찌기 국영여관 격인 원을 두었고, 그 이름이 이왕원(梨往院)이었단다.
원물에 얽힌 유래와 설화
원물오름의 명칭은 남녘 기슭에 있는 샘에 연유한다. 예전에 이 부근에 삶의 터전을 잡은 사람이 이곳에 습지가 형성되어 있음을 보고 파 보았더니 맑은 물이 솟아나왔다. 이 샘물은 생수가 없는 인근 주민의 생명수와도 같은 것이었다.
이 샘에 '원물'이라는 이름이 붙은 까닭은 이러하다. 이곳에서 조금 내려오면 동광육거리로 교통의 요지다. 제주, 한림, 대정, 서귀포 등 각 방면으로 사통오달하는 길목이다. 예전 역시 교통의 요충지였다.
"예전에 제주로 가려면 모두 이 산간지대로 다녔는데 소위 원이라고 하는 데가 있었다. 거기는 제주목에서도 중간, 대정에서도 중간, 그 원이라는 데는 사람이 몇 가호 살고 있어서 거기 가면 점심도 사먹고 술도 한 잔 사마시고, 다리도 쉬고 하는 곳이다." (韓國口傳文學大系 중에서 인용)
말하자면 站(참)이었고, 院(원)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예전에는 동광리와 서광리를 통틀어 일대를 자단리(自丹里)-한때는 광청리(光淸里)-라 했거니와 옛 지도에 대정~제주를 연결하는 驛路(역로) 선상에 自丹村(자단촌)이라고 기입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곳이 驛村(역촌)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역촌이었다면 원이 있었음도 당연한 일이다. 세종 때 교통과 연락의 편의를 위해 섬 안의 각지에 원을 두었음은 기록에도 나타난다. 원이란 공무여행의 관원, 후에 일반 나그네도 이용하도록 마련된 국영여관이었다. 그 원이 지명에 연결되어 이 샘을 '원물'이라 불리었고 오름도 원물오름(院水岳)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