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이윤엽 판화의 작품
이윤엽
[여는 마당] "소나무 장작은 왜(倭)장작!"
'불쌈꾼'(혁명가) '거리의 백발 투사'였던 백기완은 1933년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동부리에서 태어났다. 심한 풍화작용으로 기암절벽이 우뚝 선 우리나라 4대 명산의 하나이며 조선 사회를 한바탕 뒤집어 놓았던 의적 임꺽정 활동무대 구월산 자락이다. 사자춤과 양반춤으로 조선 계급사회를 신랄하게 조롱한 은율 탈춤의 본고장이었다.
일제는 그가 태어나기 2년 전인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킨 뒤 강도 높게 한반도 병참기지화를 추진했다. 군사물자를 보급하려고 식량 수탈을 일삼았고, 노동력과 군인을 강제 동원하면서 민족 말살 통치를 자행했다. 일제 암흑기였다.
"소나무 장작은 왜(倭)장작! 떵, 떠엉, 떵딱! 얼쑤~"
평소 백기완은 댓거리를 하다가도 갑자기 타령조의 장단에 맞춰 탁자를 내리치면서 이렇게 외치곤 했다. 이 불림은 여섯 마당으로 구성된 은율 탈춤 제3과장 8목중춤에 들어갈 때 양 팔을 펼치면서 던지는 외마디 소리이다. 당시 민중들의 땔감인 소나무 장작조차 수탈해간 일본 제국주의를 향한 분노의 표현이자 신랄한 풍자였다. 백기완 집안은 은율에서 500년 동안 대를 이으며 살았다.
[첫째 마당] 독립운동으로 500년 가업 풍비박산
백기완은 아버지 백홍렬과 어머니 홍억재 사이의 3남 2녀 중 넷째였다. 장련면 유지였던 할아버지 백태주는 3·1 혁명 때 전깃불도 없는 산골짝에서 5천여 장의 태극기를 제작해 은율 지역에 뿌릴 정도로 민족의식이 높았고 독립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백태주는 이 일로 일제 경찰에 끌려가 심한 곤욕을 치렀다.
1898년 백범 김구 선생이 황해도 안악 치하포에서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제에 복수를 하려고 일본 육군중위를 처단한 뒤 투옥됐던 인천 감리서에서 탈옥했을 때, 할아버지 백태주가 '쇠대접'을 한 일화도 유명하다. 백기완이 태어난 집으로 김구 선생을 피신시키고 소 한 마리를 잡아서 보름동안 극진하게 돌봐준 일이다. 일제 감시가 삼엄했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김구 선생을 도운 것이 계기가 돼서 뒷날 백기완과의 인연으로 이어졌다.
할아버지는 백기완이 태어나기 전인 1922년 장연농민공제회 창립 당시 회장을 맡았다. 1923년에는 이상재 선생 등이 주도했던 조선민립대학설립기성회 장련지부 설립에도 참여했다. 일제의 집요한 방해 공작과 홍수·가뭄으로 목표로 한 모금 운동에는 실패했지만 할아버지는 우리 민족이 일제에 동화되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려고 교육에 나섰던 지사이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 백홍렬도 장련청년회 집행위원, 장련청년동맹 검사위원을 지내며 청년운동에 관여했다. 당시 휘문고보를 나와 일본 동경 유학을 다녀온 수재였다.
"네 배지만 부르고 네 등만 따시고자 하면 키가 안 커"
결국 할아버지 백태주는 독립군에 군자금을 대어주다가 일제 경찰에 발각돼 한 달여 동안 고문을 받고 감옥에서 나왔다. 하지만 일주일도 채 안돼서 입에서 피를 쏟고 돌아가셨다. 설상가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한 큰아버지가 감옥에 갇히자 가계는 급격하게 몰락의 길을 걸었다. 어린 백기완은 항상 배가 고팠다.
"문을 차고 집에 들어와 '엄마 밥 줘' 하면 고개만 끄덕였어. 솥을 열면 콩국 한 그릇과 강냉이 한 자루뿐이었지. 그걸 홀랑 먹고 배고프다고 어머니를 졸랐어. 그때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있어. '야 기완아! 이웃들이 다 어렵게 사는데 네 배지(배)만 부르고 네 등만 따시고자 하면 너 인마, 키가 안 커!' 그 말이 내 일생을 길라잡는 새김말(좌우명)이 돼버렸어. 몸뚱어리 키도 안 크지만 마음의 키도 안 큰다는 말이야. 이 말보다 더 위대한 말이 어디 있어!"
매 끼니를 걱정하는 상황이었지만 백기완이 전하는 집안 분위기는 인간적이었다.
"거지를 빌뱅이라고 해. 어릴 때 빌뱅이 가족이 우리 집에 왔어. 밥을 달라고 한 게 아냐. 그때 부엌은 그냥 거적문이었어. 눈보라가 치면 부엌 바닥에 이만큼씩 쌓일 정도야. 빌뱅이 식구들은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어린 꼬마들까지…. 12명이었어.
우리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오라고 했지. 초가집 단칸방이지만 들어오라고 했는데 안 들어온다는 거야. 대신 실컷 울 수 있는 자리만 달라는 거야. 너무 춥고 배고파서 길거리에서 울 수 없다는 거야. 실컷 울어야 힘이 생길 것 같다는 거야. 정말로 부엌에서 코흘리개들은 배고파서 죽겠다고 아우성치고, 할아버지는 늙은이를 데리고 어디를 가냐고 울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조금만 참으시라고 말하면서 우는 거야.
그런데 말이야, 우리 어머니가 그 소리를 들으면서 우시는 거야. 그 사람들보다 더 슬프게 말이지. 어린 내가 잠이 와? 나도 울었겠지. 그 때부터 나는 조그마한 일이든, 큰일이든 괴롭고 안타까우면 울어. 그래서 내 덧이름(별명)이 울보야. 산다는 게 우는 거 아냐? 사람 죽이는 자본주의 세상 아냐? 내가 어떻게 안 울 수가 있어?"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민중 이야기
어린 백기완의 배고픔을 달래주었던 것은 이야기였다. 삯바느질을 했던 어머니, 독립운동을 했던 큰아버지와 집안 어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어린 백기완을 키웠다. 민중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온 '장산곶매', '이심이', '꼴굿떼' 이야기 속에는 양반 계급의 핍박에 저항해 온 민중혁명의 뜨거운 정서가 넘쳐흘렀다. 훗날 백기완은 이런 이야기에 예술적 상상력을 더해 민중미학, 민중사상이 오롯이 담긴 글과 말을 남겼다.
"나는 아주 몰락하는 집안에서 태어났어. 할머니와 어머니가 배고프다고 칭칭대는 나를 달래는 방법이 있었어. 삼태기에 배추꼬리를 담아 와 깎아줬지. 그런데 배추꼬리가 모자랄 만큼 겨울밤이 계속되는 거야. 눈은 내리고 배는 고픈데 밤은 깊어가지. 그럴때면 할머니와 어머니가 나한테 옛날이야기를 해줬어.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지만 입으로 눈으로 서로 주고받았던 이야기 말이야.
그런데 공자 왈 맹자 왈은 다 기록돼 있고, 소크라테스와 마르크스 이야기도 다 기록돼 있어. 그럼 이건 누가 기록하나? 아무도 안 해."
일제의 수탈은 집요했다. 끼니조차 온데간데없는 집안의 놋그릇과 밥그릇도 빼앗았다. 기와집에서 쫓겨나 초가집으로 이사했고, 초등학교 4학년 때 문간방으로 옮겼다. 여덟 식구가 한 방에서 살았던 시절, 백기완의 꿈은 '돼지기름 덩어리 한 조박(조각의 황해도 사투리)을 먹는 것'과 축구선수가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돼지 한 마리 잡으면 한 개가 나오는 오줌통 축구공은 어린 백기완에게는 언감생심이었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아이들과 함께 새끼줄을 둘둘 말아 만든 공을 차고 놀았다. 맨발로 공을 차다가 오른쪽 엄지발톱이 빠지기도 했다.
1945년 해방 때 백기완은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어린 그에게도 8·15 해방은 가슴 벅찬 감격이었다.
"그날, 황해도 구월산 밑 산골동네도 만세 소리로 한바탕 발칵 뒤집혔지. 아버지는 너무나 감격해 덩실덩실 춤을 추시다가 그만 똥통에 빠졌는데도 '덩실덩실', 그걸 본 마을 사람들도 건질 생각은 아니 하고 함께 뛰어들면서 와당탕. 똥통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자유, 해방을 외치며 그야말로 감격이었지."
백기완은 그해 글짓기 시간에 '네 주의 내 주의 다 버리고 새 나라를 위하여 한 뭉치 되자'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글은 학교에서 장원으로 뽑혔다. 이를 계기로 은율 군청 강당에서 '건국을 위하여 한 뭉치 되자'는 제목으로 웅변을 했다. 백발의 갈깃머리를 휘날리며 최루탄과 지랄탄이 난무하는 거리에서 사자처럼 포효하는 모습으로 각인된 백기완이 대중 앞에 나선 첫 무대였다.
[둘째 마당] 고향 떠난 소년 백기완은 맨발, 알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