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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나가던 명월관 주인, 여고 국악선생님 되다

[윤중강의 인천국악로드] 경동 159번지에서 시작된 이두칠의 인천국악

등록 2021.03.13 19:54수정 2021.03.13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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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국악 이야기는 다른 문화·역사에 비해 덜 알려진 편이다. 인천시민들의 가슴속에서 울고 웃고, 신명나게 놀았던 인천국악의 숨은 이야기들을 연재한다.[기자말]
1950년 2월 19일, 설(구정)을 앞두고, 인천에서 장사를 크게 하는 대표들이 하룻밤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된다. 한 사람은 극장주인(문화관), 두 사람은 요릿집 주인(명월관, 국일관). 세금을 체납했다는 게 명목인데, 왜 갑자기 이리 됐을까?

당시엔 '떡값'이란 게 있었다. 한국의 공무원사회가 제대로 자리잡기 전, 명절을 앞두고 자발적으로 상납을 하기도 했단다. 세 사람이 떡값을 보내지 않았거나, 세 사람에게 떡값을 달라는 요구로 읽히는 대목이다.


최선경과 이두칠이 이끈 인천국악
 
 인천 풍류의 거장 이두칠. 그는 인천여고 교사로 활동하면서 인천국악의 부흥을 주도했다.

인천 풍류의 거장 이두칠. 그는 인천여고 교사로 활동하면서 인천국악의 부흥을 주도했다. ⓒ 윤중강



인천의 국악과 요릿집을 얘기할 때, 명월관은 빼놓을 수 없는 장소다. 명월관의 주인은 이두칠(1901년~1975년). 경동 159번지와 160번지가 그의 소유였다. 각각 가정집과 요릿집으로 사용했다. 여기서 국악기소리가 밖으로 새어나왔다. 요릿집에서 국악소리가 많이 났을까? 아니다. 가정집에서 자주 들렸단다.

이 집엔 피아노도 있었다. 당시 인천에 외제 피아노가 딱 두 대가 있었다. 경동 159번지에 한 대가 있었던 거다.
     
이두칠은 국악의 애호가이자, 전문가였다. 틈만 나면 홀로 풍류를 즐겼다. "저희는 국악기소리만 들어도 머리가 아팠어요." 이두칠의 딸들은 이해를 구하듯 말했다.

"한 시간은 대금, 또 한 시간은 가야금, 다시 또 한 시간은 거문고... 하루에 몇 시간을 국악기소리만 들었답니다."

이 집에는 가끔씩 풍류객이 모였다. '구락부 할아버지'가 오시는 날이면, 풍류방은 더욱 더 활기가 돌았다. 여기서의 구락부는 이우구락부(以友俱樂部)를 말한다.


1920년, 이우구락부가 생겨난다. 지금의 동인천역 앞, 용강정 (인현동) 27번지에 사무실을 두었다. 구락부(俱樂部)는 클럽(club)으로, 본질적으로 사교모임이다. 인천에서 처음 생겨난 사교모임은 왜 '이우구락부'라고 이름을 썼을까?

고일이 쓴 <인천석금(仁川昔今)>에는 '이문회우(以文會友)'에서 나온 말로 추측한다. 맞는 말이나, 좀 더 정확히 해야 한다. 이문회우라기보다는, 이우보인(以友輔仁)의 '이우((以友)'로 봄이 더 타탕하다. "글로써 벗을 모으고(以文會友), 벗으로서 어질게 됨을 도우라(以友輔仁)"는 뜻이다.


이우구락부 회원들은 벗들과 함께 인천을 좋게 만드는 일에 앞장섰기에, 이우보인이 더욱 적절하다. 그들은 이우보인의 인(仁)을, 어질 인자를 쓰는 인천(仁川)으로 생각했을 거라고 합리적인 짐작을 해본다.

인천 '이우구락부'의 성격은 매우 복합적이다. 조선의 고악(古樂)을 중심으로 국운이 쇠한 나라에 민족정신을 고취한다는 점에서는 서울의 정악유지회(正樂維持會)와 비슷하다. 서울의 정악유지회가 후원적인 성격에 머물렀던 것과는 다르게, 이우구락부의 구성원들이 모두 국악기를 다룰 줄 알았다.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당시 인천 최고극장인 가부기좌(歌舞技座)를 비롯해 내리교회에 이르기까지, 인천의 주요한 행사가 있을 때면 직접 무대에 올라 연주를 했다. 다음은 하와이 동포를 위한 이우구락부 회원의 연주기록 중 하나다.

"이우구락부 음악부원 일동은(하와이 동포) 일행을 위안코자 우리나라의 고악을 들려주고자 예전 정악(正樂)을 하야 일행의 귀를 기울이게 하였으며..." (1923년 7월 15일 <동아일보>)

이우구락부 회원 중 인천 풍류의 중심에는 최선경이 있었다. 이두칠의 가족들이 '구락부 할아버지'라고 불렀던 분이다. 그는 이우구락부에서 학습부장을 맡았다. 그는 영화학교와 관련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훗날의 지면을 기약한다.

자동차 수리하던 이두칠이 대금을 잡기까지
 
 이두칠의 호적, 주소가 기록돼 있는 자료

이두칠의 호적, 주소가 기록돼 있는 자료 ⓒ 윤중강


이두칠은 원래 어디 사람이었을까? 원래 국악을 했던 사람이었을까? 둘 다 아니다. 경기도에서 어렵게 살던 이두칠은 자수성가를 꿈꾸며 인천에 오게 된다. 자동차 관련 일을 하게 되고, 운전수로서 확고한 지휘를 얻는다.

이두칠을 아는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하는 얘기가 있다. 심성이 곱고 성실하며, 말수가 적고 손재주가 뛰어나다. 이두칠은 자동차 운전을 시작으로 해서, 자동차의 수리와 정비에 남다른 기량을 발휘한다.

자동차의 제니(除泥, 흙털이)를 새롭게 발명해서 특허국에 등록출원을 했다는 기사(1931년 2월 13일 <동아일보>)도 있다. 자동차 정비업이 성공하고, 이를 발판으로 명월관을 개업했다.
     
이두칠은 평생 풍류를 자신의 곁에 두었다. 이우구락부의 전통을 이어서, 풍류모임을 지속했다. 1936년 7월 6일 밤 8시 30분~9시, 경성방송국(jJODK) 에서는 <영산회상>이 방송됐다.

그 때의 방송은 모두 생방송인데, 대금은 이두칠이 잡았다. 함께 한 풍류인들의 이름이 생소하다. 인천의 풍류인들이 경성방송국에 초대를 받아서 연주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두칠은 '인천풍류'에 대한 애착이 누구보다도 강했다. 1920년대에는 매우 성행했으나,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점차 활발하지 못했던 풍류를 살리고자 했다. 최선경은 1920년대 인천풍류의 중심이 된 분인데, 어떤 연유에선지 1930년대엔 인천을 떠나게 되고, 풍류활동도 뜸해진다.

최선경을 사사한 이두칠은 이런 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기고, 스승을 섬기며 꾸준히 1970년까지 인천풍류를 지킨 분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이두칠 부부는 최선경(구락부 할아버지)이 인천에 오면 극진히 모셨다.
 
 1949년 3월 19일 <경향신문>에 실린 영화 <조국의 어머니> 신문영화광고(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화면 갈무리)

1949년 3월 19일 <경향신문>에 실린 영화 <조국의 어머니> 신문영화광고(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화면 갈무리) ⓒ 경향신문


이두칠의 집이자, 스승 최선경이 오면 풍류(인천풍류)가 더욱 생기가 돌던 곳! 인천풍류문화의 중심지가 된 경동 159번지에선, 영화도 찍었다. <조국의 어머니>(1949년, 윤대룡 감독)는 일제에 의해서 독립투사인 남편(허영)을 잃은 아내(주증녀)가 남편의 뒤를 이어서 독립운동에 가담을 해서 해방을 맞이한다는 내용이다. 여배우 주증녀(1926년~1980년)의 영화데뷔작이다. 영화에서 주증녀가 입은 한복은, 이두칠의 아내가 빌려준 옷이라고 한다.

인천 싸리재 한켠에 위치한 반듯한 적산가옥은 이렇게 풍류소리도 끊이지 않고, 영화촬영을 할 정도의 곳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이두칠 가족은 여기서 떠나게 된다. 전쟁 중에 집의 일부는 불타기도 했다.

인천여고 국악선생님 이두칠
 
 옛날 인천여고 교정

옛날 인천여고 교정 ⓒ 윤중강

 
 인천여고 졸업앨범(1957년)에 있는 사진으로, 인천여고 국악반이 가야금과 양금을 연주하는 모습이다.

인천여고 졸업앨범(1957년)에 있는 사진으로, 인천여고 국악반이 가야금과 양금을 연주하는 모습이다. ⓒ 윤중강


한국전쟁 이후, 이두칠에겐 직업이 하나 생겼다. 인천여자고등학교 국악 선생님이 된 것이다. 당시 인천여고는 제5대 심상원 교장(1954년 7월~1961년 7월)이 재직했는데, 그는 민족교육의 일환으로 국악을 강조했다.

인천여고의 많은 여학생들이 가야금과 양금 등을 배웠다. 이두칠은 국악교육을 시작했으며, 학생들이 늘어나자 김병호(1910년~1968년)가 합류한다. 이두칠은 정악(풍류)를 가르쳤고, 김병호는 가야금산조를 가르쳤다.

김병호는 3년 정도(1959년~1961년) 가르치다가, 서울의 국악사양성소(현 국립국악중고등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이두칠과 김병호가 인천여고의 국악특활반을 함께 운용할 당시, 이두칠은 김병호에게 가야금산조도 배웠다. '김병호류 가야금산조'이며, 훗날 경아대에서 이두칠이 가르친 가락이다.

한국전쟁 이후, 인천여고는 심상원 교장과 이두칠 국악강사는 의기투합으로 인해서, 국악활동이 돋보인 시기였다. 당시 덕성여대가 주최하는 '전국여중·여고 국악경연대회(1954년~1957년)'에서 인천여고는 우수한 성적으로 입상을 했다.
 
 인천여고 출신 김명자(좌)와 김소자(우)는 평생 국악계에 몸담았다.

인천여고 출신 김명자(좌)와 김소자(우)는 평생 국악계에 몸담았다. ⓒ 윤중강


입상자 중에는 이두칠의 딸(이효자)도 있었다. 이 시절의 인천여고 출신으로 평생 무용을 해온 두 사람이 있다. 김명자(고 이매방의 아내)와 김소자(무용교사)는 인천여고 학생으로 이두칠에게 국악(가야금, 양금, 장구)을 익히기 시작하면서, 평생 국악(무용)계에 몸담게 되었다.

이 시절을 증명해주는 한 장의 사진이 있다. 인천여고 졸업앨범(1957년)에 있는 사진으로, 인천여고 국악반이 가야금과 양금을 연주하는 모습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인천시 인터넷신문 'i-View'에도 실립니다. 글쓴이는 윤중강 문화재위원(국악평론가)입니다.
#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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