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대 부산이사청과 부산경찰서일제 강점기 부산권력 기관의 핵심 장소로 사진으로 보면 한가하다. 부산경찰서 현판이 뚜렷하게 보인다. -제공 : 부경근대사료연구소
부경근대사료연구소
박재혁은 마침내 9월 14일 오후 2시 30분경 부산부 금평정(琴平町) 부산경찰서로 들어갔다. 부산경찰서는 1876년 2월 강화도조약으로 인한 근대 개항이 되면서 1880년 4월 현 영주동 봉래초등학교 자리의 옛 초량객사를 청사로 사용하였다. 1894년 개성학교(훗날 부산상업학교, 현 개성고)를 설립한 선각자 박기종이 오늘날 부산시 경찰청장에 해당하는 부산항 경무관을 역임했다. 부산경찰서는 1897년 현 중구 광복로 85번길 15(동광동 2가 10-5)로 이전했다. 이 건물이 화재로 소실되자 1905년 새 청사를 지었다. 신축 건물은 2층 규모로 서구식 목조 건물로 건축되었다.
외벽(外壁)을 널빤지를 따닥따닥 포개어 이어 붙인 비늘판 붙이기로 꾸며 놓았고 서구식 창문에다가 일본식 팔작(八作)지붕으로 지었다. 건물 위쪽에는 부산이사청이 있었다. 그래서 1906년 부산이사청 경찰서로 개칭되었다가 1907년 부산경찰서로 개칭되었다. 이후 부산경찰서는 1924년 6월 9일 현 중부경찰서 자리로 신축 이전했다.
1910년대 찍은 사진을 보면 경찰서 입구에는 경찰이 경비를 서는 모습이 있지만 다소 한가롭다. 경찰서라지만 경비가 다소 허술한 듯하다. 이는 아마 부산이 가장 친일적인 활동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사진으로 보면 이동하는 사람들도 거의 없는 다소 한적한 공간이다.
조선옷을 입은 박재혁은 부산경찰서 앞에 도착했다. 경찰서 경비는 의심하지 않았다. 박재혁은 다만 맨몸으로 폭탄 하나를 품고 뚜벅뚜벅 대담하게 경찰서로 들어갔다. 마음대로 경찰서 계단 아래의 사무실 안에 침입하였다. 조선인 옷을 입은 박재혁은 어떠한 안내도 없이 서슴없이 사무실로 들어갔다. 누가 보아도 당당했다. 마치 공무가 있어서 온 사람같이 보였다.
유자명은 "경찰서 대문 앞에는 문을 지키는 경찰 하나가 서 있었다. 박재혁은 그 경찰에게 '나는 경찰서장에게 직접 드려야 될 비밀 정보가 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경찰은 박재혁을 경찰서장이 있는 사무실로 데리고 갔다"라고 했다. 경찰서장은 경찰서의 다른 직원과 함께 사무실 안에 있었다. "당시 하시모토 서장은 사무실에서 공문서를 적고 있었는데, 조선인 옷을 입은 연령 26, 7세의 조선인이 어떠한 안내도 없이 서슴없이 사무실로 들어와 서장 앞에 잠시 멈춰 서서 면회를 요청하였다."
박재혁은 하시모토 서장의 오른쪽 가까이 접근하였다. 업무를 보고 있던 하시모토 사장을 붓을 멈추고 박재혁 쪽으로 몸을 돌리려 했다. 박재혁은 주머니 아래에 가죽띠로 감아 손수건으로 폭탄을 감싸있었다. 하시모토 서장에게 접근하면서 순간적으로 안전핀을 벗겨 서장 의자 사이로 내던졌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박재혁은 '나는 상해에서 온 의열단원이다. 네가 우리 동지를 잡아 우리 계획을 깨트린 까닭에 우리는 너를 죽이는 것이다'라고 말을 할 틈도 없었다. 박재혁은 경찰서에 들어온 후 10여 분을 지나 거사를 했다. 그때가 2시 40분경이었다. 오로지 박재혁은 폭탄을 터트리는 데 집중했다.
박재혁의 폭탄은 도화선을 사용하지 않은 러시아식 자폭 폭탄이었다. 폭탄은 철과 놋쇠 통에 들어있었던 것으로 작열 소요 장진을 한 지름 약 2촌(寸, 6cm), 높이 약 4촌(12cm)의 주철(鑄鐵)로 만든 원통형 폭탄이었다. 박재혁은 폭탄을 투척하면 부산경찰서 청사를 파손하는 것은 물론 경찰서장을 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미리 예상하고, 또 이에 따라서 지방 민심의 동요(動搖)를 초래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김원봉에게 받은 폭탄은 1902년식 폭탄이었다. 김원봉이 폭탄을 실제 제조한 것은 헝가리인 마자르(Magyar)와 1920년 말 혹은 1921년 초 상해에서 였다. 마자르가 만든 폭탄은 제2차 중국과 국내 암살·파괴 계획 때 사용한 폭탄이었다. 1920년 3월 제1차 국내 암살·파괴 계획을 위한 폭탄은 상해에서 구매한 것이었다.
박재혁의 폭탄은 마자르가 만든 인명 살상의 성능이 좋은 폭탄이 아니었다. 김원봉이 준 폭탄의 구입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일본 경찰은 간도 지방 또는 상해나 러시아 방면에서 입수한 것으로 추측하였다. 1902년식 폭탄이라면 제조한 지 오래되었고 사용법이나 성능도 긍정적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폭탄을 가지고 연습을 한 적이 없었던 박재혁은 폭탄 투척 방법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박재혁은 하시모토 서장 근처 마룻바닥에 폭탄을 던졌다. 폭탄 투척 현장은 하시모토 서장 책상과 수부(受付) 계원석과의 중간부였다. 박재혁은 폭탄을 투척한 다음 연기가 자욱한 순간을 틈타 도주하려 했다. 엉겁결에 폭탄을 던졌으나 멀리 던지지 못했다. 겨우 3척 정도, 1m 앞이었다. 폭탄을 하시모토에게 던진다고 하였으나 하시모토가 앉은 의자의 다리를 맞고 폭탄이 도로 박재혁 쪽으로 굴러왔을 가능성이 있었다. 수류탄의 폭발 시간은 지극히 짧았다. 던진 찰나 박재혁의 발밑에 굉연한 음향과 함께 푸른 연기가 자욱했다. 폭탄은 굉음을 내면서 터지고 폭탄 파편은 사방에 날려 흩어졌다.
폭탄의 위력은 컸다. 안전핀식 수류탄은 그 위력이 큰 것은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인정했다. 파편 하나는 하시모토 서장 가까이 있던 모(某) 경부의 걸상을 부수고 사무실 구석 벽을 뚫고 더욱이 사환 방에 손상을 입힐 정도였다. 폭탄 파편은 서장이 있는 중형 평상 안락의자의 오른쪽 다리를 분쇄하였지만, 한편은 또 천장을 관통하여 2층 사법실 마루판을 관통하여 마침 집무 중인 와다(和田) 사법주임의 의자, 책상 등을 파괴하였다. 폭탄 투척 때문에 사무실 내의 의자, 탁자, 서적궤 및 유리창 등 다수의 집기가 파괴되었을 뿐 다행히 경찰서 직원과 기타 사람들에게는 상해를 입히지 않았다. 폭발 정도가 맹렬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의 사상자도 나오지 않는 것은 하늘이 도왔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