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 상공의 푸른 하늘
박도
나는 오대산 월정사에 자주 간다. 내가 월정사를 알게 된 것은 대학시절 은사였던 조지훈(본명, 조동탁) 시인 때문이다. 그분은 일제강점기 젊은 날 그곳에서 지냈다는 말씀을 자주 했다.
이후 나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대학의 한 선배가 1965년 불교학생회 여름방학수련에 월정사에 갔다. 수련기간 중 상원사 법회에 갔다가 내려오는 도중 소나기를 만나 갑자기 불어난 급류로 조난당했다. 그런저런 연유로 월정사는 마음에 새겨진 곳이다.
1990년대 초 나의 데뷔작인 장편소설 <사람은 누군가를 그리며 산다>를 집필하면서 작품의 첫 배경 장면을 오대산 가는 길로 정했다. 그런 뒤 현장 취재로 여러 차례 답사하기도 했다. 교사가 된 이후는 학생들의 수학여행 길에 그곳을 안내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2000년대 초 오대산 월정사 앞 지장암 옆에 천연 수목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선산에 모신 조부모, 부모 네 분의 묘지를 굳이 그곳 수목장으로 천장했다. 그런 뒤 나도 그곳에 수목장을 해달라고 가족들에게 유언을 한 바 있다.
조상의 수목장을 한 이후는 해마다 7, 8차례씩 오대산을 다녔다. 조상님 기일, 추석 설날, 한식 무렵에 찾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첫 작품 이후에도 주요 작품을 집필할 때는 아예 그곳 원주실의 배려로 명상관에서 장기간 머물렀다. 나의 장편소설 <약속> <허형식 장군> <용서> 등은 그곳에서 썼다.
"불효자는 웁니다"
그렇게 부지런히 다니던 가운데 지난해부터는 코로나19 사태로 한 번도 다니지 못했다. 5월 8일은 어버이날이고, 5월 10일은 어머니 96회 생신날이다. 그래서 9일 용기를 내서 진부행 시외버스를 탔다.
버스가 출발하자 내 눈에서는 주책없이 눈물이 주르르 쏟아졌다. 나이가 들면 눈물도 흔해지는가? 아마도 부모님에 대한 불효 때문인가 보다. 나는 불효막심한 자식이었다.
불러 봐도 울어 봐도 못 오실 어머님을
원통해 불러보고 땅을 치며 통곡해요
다시 못 볼 어머니여
불초한 이 자식은 생전에 지은 죄를 엎드려 빕니다.
손발이 터지도록 피땀을 흘리시며
이 못난 자식의 금의환향 바라시고
고생하신 어머님이 드디어 이 세상을 눈물로 가셨나요
그리운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