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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긴 것도, 갖고 싶은 것도 하나 없이
정의와 평화를 기도한 이정순 열사

[잊혀진 투쟁, 91년 5월 ⑨] 이정순 열사, 1991년 5월 18일

등록 2021.05.19 19:24수정 2021.05.20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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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항쟁은 누구나 기억하는 민주화의 역사이지만 1991년의 투쟁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1991년의 어느 봄날, 명지대 신입생 강경대 학생이 노태우 정권 타도, 학원자주화 투쟁 과정에서 경찰의 폭력으로 숨지자 이를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이 과정에서 폭력정권을 규탄하며 모두 11명의 학생, 노동자, 시민들이 자신의 생명을 바쳤다. '1991년 열사투쟁 30주년 기념사업회'는 30년 전 1991년 5월 투쟁에서 민주의 꽃이 된 열사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말]
 이정순 열사.
이정순 열사.김동석 화가
 
집에서 광화문으로 향하는 버스는 늘 연세대 정문 맞은편 굴다리를 지나간다. 지하철을 이용해도 되지만 광화문을 향할 때면 홀로 굴다리 위에서 여인의 몸으로 두려움과 외로움으로 분투하였을 39세의 어머니를 생각하며 버스를 이용한다.

나는 어머니의 뜻을 헤아리고자 굴다리 철길 위에 20대, 30대, 40대의 내가 어머니의 모습으로 서 보기를 수없이 반복하였다. 굴다리가 가까워올수록 심장이 조여 오고 두려움과 슬픔이 몰려온다. 나이가 들수록, 엄마라는 자리를 지켜내며 하루하루를 분투할수록 그 아픔도 깊이를 더한다.

신념(1991년작)

신념은 모든 미망을 지워준다
기름진 대지에 뿌려진 신념은
한 톨의 씨앗에 비할 수 있다
한 톨의 씨앗은 성장하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한 톨의 씨앗은
몇 만 톨의 같은 씨앗이 되는 것이다
신념은 연거푸 새로운 신념을 낳는다
신념에는 미망이 끼어들 틈이 없다
신념이 미망을 지워 버리는 것이다


연세대 정문 맞은편 굴다리 위 철길에서 몸을 던진 여성

1991년 5월 18일, 신군부 정권의 폭력으로 숨진 강경대 열사의 노제 행렬이 광주 북구 망월동 5.18묘역을 향해 연세대 정문을 나서던 순간, 정문 맞은편 굴다리 위 철길에서 짧은 구호 소리가 들렸고, 한 여인이 불이 붙은 채 8m 아래 도로에 떨어졌다.

그녀는 바로 옆 세브란스병원 응급실로 옮겨졌으나 도착하자마자 숨을 거뒀다. 철길 옆 풀밭에 남겨진 체크무늬 여행 가방 속에서 유서와 가톨릭 기도문이 발견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나의 어머니, 이정순이었다.


그 당시 나는 14세 중학교 1학년이었다. 학교 수업 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전해 듣고 나를 데리러 오신 신부님을 따라 광주 5.18묘역에 묻혀 계신 어머니를 뵈었다.

형편상 어머니와 떨어져 지냈지만 때때로 4남매를 찾아오셔서 맛있는 음식을 해주시고, 예쁜 옷도 사서 보내주시고, 자녀들 담임선생님께 편지도 보내셨다. 가까이서 자녀를 챙기지 못한 어머니께서 그 당시 자녀를 위해 하실 수 있는 최선이셨을 것이다.


분신하시기 몇 주 전 목욕탕에서 자녀들의 묵은 때를 밀어주시던 어머니의 갑작스런 부고 소식. 친가를 위해 서울에서 같이 살자던 어머니의 제안을 거부했던 나로 인해 돌아가신 것 같았다. 그런 죄책감과 동시에 사랑했던 만큼 밀려오는 어머니 대한 배신감과 분노의 감정이 겹치면서 나는 표현할 수 없는 어두운 감정에 억눌린 사춘기와 청년기를 보내야 했다.

내 인생의 허허 벌판에(1988년작)

내 인생의 허허 벌판에
홀로 웅크리고 있노니
낮에는 햇볕이 지겹도록 쬐이고
밤은 무섭도록 길고
내 영혼 무엇과 있노라 말인가
하얀 백지에 무얼 그리려고


독립운동가 아버지, 여순사건 연루자 외할머니
 
 이정순 열사는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노동자 생활을 시작했다. 사진은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찍은 것이다(뒷줄 맨오른쪽).
이정순 열사는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노동자 생활을 시작했다. 사진은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찍은 것이다(뒷줄 맨오른쪽).공문정씨 제공
 
이모 이옥자의 증언에 따르면 어머니와 형제들은 어릴 적부터 젊은 시절 독립운동을 하셨던 아버지로부터 "나라가 없는 민족은 자식도 없다. 나라 없는 민족은 공부를 해도 남의 종이 되는 공부만 한다. 우리나라는 통일국가가 되어야 외세의 침입을 막을 수 있다. 미국과 일본은 언제나 한편이고, 일본은 절대 우리나라를 포기하지 않는다"라는 밥상머리 교육을 받으셨다고 한다.

또 리어카를 끄시는 없는 살림에도 "콩 한 쪽도 열 사람과 나누어 먹고, 남은 것을 물에 던지면 퐁당 소리가 난다"며 "나라가 살려면 내일 굶더라도 나누어 먹고 함께 살아야 한다"라는 아버지의 나눔의 실천을 보고 자라셨다.

"나라 일을 하는 분이 우리 집에 오셨을 때 가진 것을 다 주고 멀리 도망가도록 해야 하고, 만약 경찰에 잡혀가 고문을 당하더라도 어차피 말해도 죽고 말 안 해도 죽으니 그냥 모른다고 하고 죽으라"라는 당부를 듣고 자란 어머니는 준비된 여전사였다.

외할머니도 외할아버지 지인 부탁으로 방 한 칸을 비워줬다가 여순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서에 끌려가 이 4개와 양쪽 갈비뼈가 부러지고 엉덩이가 비틀어지는 모진 고문도 받았다.

내 나라 안위를 걱정하라(1990년작)

이런 생각에 잠겼나이다
내 나라가 통일하면
어느 자들도
침략에 대한 핑계를
일삼지 않을 것이라는
뜻과 글을 모아 보았나이다
작은 보석이 신기하듯이
내 나라 앞서는 나라
신기한 나라
슬기와 지혜의 국민이 되고
힘이 있는 국민이 되어야 하나이다
이 나라는 자유의 충령님들이
지키고 일으켜 줄 것입니다


'달래'와 '샛별'이란 애칭 남겨준 어머니
 
 이정순 열사는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노동자 생활을 시작했다. 사진은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찍은 것이다(앞줄 맨왼쪽).
이정순 열사는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노동자 생활을 시작했다. 사진은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찍은 것이다(앞줄 맨왼쪽).공문정씨 제공
 
어머니는 외할아버지께 시 작문하는 법을 배웠다. 외할아버지는 "시는 가슴에 있는 그대로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 가르치시면서 어린 자녀들에게 시를 지어 와서 낭송하게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어머니께서 자녀를 부르는 이름도 남달랐다. 어릴 적 호적 이름으로 부르지 않으시고 애칭을 부르셨는데, 나의 어릴 적 이름은 '달래'였다. 어머니의 마음을 달래주는 아이라고 해서 '달래'라고 지으셨다고 어머니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애칭으로 불리는 경험은 내게 어머니의 특별한 사랑의 기억이고 가슴에 새겨진 유산이다. 막내의 어릴 적 이름은 '샛별'이다.

나무야 나무야(1988년작)

너는 언제 남들처럼
잎사귀 피나 하였더니,
'나는야 나는야
한 발짝 더 가까이
아주 가까이 다가옴이니
더 크고 더 많이 피고파 늦으오니
잊지 말고 날 보아주소서
그때 나의 멋을 알으소서' 하더라
나무야 나무야 너는 아직도
잎사귀 피지 않니 하였더니,
'나는야 나는야
깊고 깊은 마음이길래
늦게 피어
넓은 그늘 만들어
늦게 지려 하오' 하더라


1995년 당시 새 세상을 여는 천주교여성공동체 윤순녀 회장은 4주기 추모전례 추모자료집에 실린 '이정순(카타리나)님의 뜻을 기리며'라는 제목의 글에서 어머니와의 만남을 이렇게 회상했다. 길지만 당시의 상황이 잘 정리돼 있어서 인용해본다.

핸드백에서 발견된 묵주... "가톨릭 단체나 신자 나오세요"
 
 이정순 열사.
이정순 열사.공문정씨 제공
 
지난 5월 18일 이정순(가타리나)님의 네 번째 기일이었다. 나는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이 여인을 위해 기도하고, 남아있는 그 유가족들의 아픔을 주님께서 위로해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나와 이정순님의 만남은 1991년 5월 18일, 강경대 열사의 장례식 날로부터 시작되었다. 낮 11시쯤, 너무 많은 인파 속에 장례 행렬을 따라 연세대 정문 옆에 서 있는데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길 건너 철길 아래서 시커먼 연기가 치솟았다. 직감적으로 또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곧 이어서 들리는 소리는 또 누가 분신을 해서 연세대로 실려 갔다는 슬픈 소식이었다. '하느님, 이 무슨 일입니까? 꽃다운 젊은 학생의 제물 하나만으로 부족하셔서 상여 나가는 이 자리에서 또 한 사람의 의로운 제물을 부르십니까!' 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먼 산만 바라보며 울었다.

그리고 오후 1시쯤 장례행렬이 신촌 로터리에 운집하여 전경과 대치해 있는데 저 멀리 마이크에서 "가톨릭 단체나 신자 나오세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하고 나가보니 아까 분신한 사람이 여자인데 가톨릭 신자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급히 몇 사람과 함께 연세대 영안실로 갔더니 학생들이 삼엄하게 영안실을 지키고 있고, 강경대 학생이 누워 있던 자리에 이름 없는 여인 한 사람이 들어가 있었다.

이기우 신부님과 돌아가신 분을 위해 기도 드리고 나서 이 여자가 누구인지를 찾기 시작했다. 분신할 때 가지고 있던 핸드백에서 묵주와 의료보험카드 등을 발견하고 가락동 신자임을 알았다. 가락동행 택시를 탔다.


그날이 마침 토요일 오후라 시내를 빠져나가는데 시간이 걸렸고 진땀을 흘리면서 성당에 도착하니 형사들이 먼저 다녀간 뒤였고, 교회 분위기는 냉랭했다. 성당 사무장이 얼마나 불친절한지 한다는 소리가 "그 여자 정신병자인데 왜들 이렇게 찾아와서 시끄럽게 물어보는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본당신부를 만나보니 아는 분이었는데 이정순씨는 몇 번 만난 신자였고 성령운동에 열심이었으며 때로는 신부들을 야단치기도 해 좀 거북한 소리도 들었다고 했다. 아무튼 가락동 신자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다시 연세대로 돌아와서 빈소를 차렸다.

그날 밤 9시 TV 뉴스를 본 가족들이 새벽에 빈소에 도착하여 울음바다가 되면서 우리는 이 여인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하나둘씩 알게 되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장례식이었다. 교회에서는 자살한 사람을 위해서는 미사를 할 수 없게 되어 있는 교회법 때문에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쳤으나, 그래도 다행히 함세웅 신부님과 정의구현사제단의 젊은 사제 10여 명이 가락동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집전하여 가시는 분의 넋을 위로해 주셨다.


이정순님의 고향 순천에 도착하니 밤 9시경,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순천대 학생들이 횃불을 들고 마중 나와 있었다. 순천 조곡동 성당까지 2km를 걸어서 학생들이 운구했다.

성당에 도착하니 성당 안쪽으로 불을 밝히고 천여 명이 넘는 신자들이 기도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광주에서 5.18 유가족들도 이미 와 계셨고 망월동 묘지로 꼭 모셔야 한다는 그분들의 의견에 순천에서 준비한 장지는 광주로 바뀌었다.

조곡동 성당, 예수님 십자가 밑에 놓여진 시신은 드라이아이스로 처리하여 신자들의 철야기도 속에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 아침 광주 망월동으로 출발, 민족의 열사들이 누워있는 영원한 안식처에 이정순님의 피곤한 육신이 함께 묻혔다.


정신병자로 취급되기도 하고 비관 자살했다고 신문에 보도되었던 이 여인이 고향에 돌아와서 뜨거운 환영을 받았고 지금 망월에 묻혀 있다.

그리움(1991년작)

나는 세상에
남긴 것도 아무 것도 없나이다
나는 이 세상에
갖고 싶은 것도 어느 것도 없나이다
다만 소원이 있다면
이 세상을 말하고 싶어요
그리움이 있다면
다만 통일이라오


"정신이 좀 문제가 있다던데, 어때요?"라고 물어온 형사

이모 이옥자는 언니의 분신 소식을 듣고 서울로 급히 올라갔다. 오월의 열사들을 모시고 하늘로 올라가겠다는 언니 이정순의 알 수 없는 수많은 말들과 행동들의 의미가 한꺼번에 퍼즐이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며칠 전, 서울 살던 언니 이정순이 불현듯 고향 순천을 찾았었다. 언니는 강경대 죽음에 항의하며 분신한 뒤 병상에 누워 있던 전남대 박승희를 보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리고 순천 동천이 보이는 죽도봉의 나무 아래에서 언니는 동생 옥자에게 너무 많은 젊은이들의 희생을 안타까워하며 이렇게 말했다.

"박승희의 세례명도 아가다고, 너도 아가다야. 네가 박승희고, 박승희가 너다."

그때 이모는 아무리 그래도 분신한 박승희를 이해할 수 없다고 언니 이정순에게 답했다. 그런데 언니가 몸에 불을 붙였다니, 믿을 수 없는 소식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정신없는 상경길, 잠시 들른 휴게소 화장실에서 누군가 이모부에게 접근했다. 그는 다짜고짜 "정신이 좀 문제가 있다던데, 어때요?"라고 물었다. 이모부는 그런 일 없다고 화를 내고는 이모에게 이 일을 전했다.

이모 이옥자는 질문을 한 이가 형사였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실제로 이후 '운동권 학생도 노동운동을 하던 사람도 아니었는데 분신을 하다니 온전한 정신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여러 시민단체에서도 흘러나왔다.

어머니가 죽기 전 성당 사무장에게 맡긴 부시 미국 대통령, 소련 고르바쵸프, 정치인은 들으시오, 박찬종 등 4통의 편지와 집에서 발견된 일기장과 시 쓴 노트 서너 권 정도를 안기부 직원들이 가져갔다.

여성이고 학력이 짧다는 이유만으로 열사의 거룩한 뜻이 폄하되는 현실에 한명숙, 이우정씨가 속한 여성단체에서 열사의 집을 직접 찾아가보니 방에는 책들이 가득 차 있고, 바닥에는 이미 안기부가 방문해서 뒤진 흔적들과 시 쓰는 초안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고 한다.

시 초안에는 나라를 걱정하고 생각하는 애틋한 내용들이 줄을 이었다. 이 초안들을 모아 단체의 도움으로 2011년 열사 추모집 <내 빛은 어느 빛이련가>를 출간하게 된다.

이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소서(1991년작)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하느님 아버지시여
굽어 살피소서
이 땅을 구하사
우리를 구원하소서
이 땅에 무례한 이들이 없게 하소서
이 땅에 아버지의 뜻을 어기는 자가
그리도 많사옵니까
용서하여 주소서
하늘나라 아버지시어
기도소리 들어주소서
간절히 청하옵니다
아버지 들어주소서
이 땅에 사랑과 광명의 빛을 내려 주소서
분노와 환난을 멈추게 하소서
화해의 길로 인도하소서
이 땅을 한 마음 한 뜻으로 이루어
뜻을 펼치게 하옵소서, 아멘

통일로 가는 나라3 (1991년작)

내 눈은 광명의 뜻으로 이남에 두고
내 가슴은 사랑의 뜻으로 이북에 두고
정의와 평화의 날개를 달고
날 사랑하는 곳에 묻히리라


노동하면서 시 쓰기를 놓지 않았던 고귀한 마음
 
 이천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 있는 이정순 열사의 묘역.
이천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 있는 이정순 열사의 묘역.공문정씨 제공
 
어머니 이정순의 세례명은 '카타리나'였다. 맑음으로 정화를 이룬다는 뜻의 이름이었다. 일곱 남매 중 장녀였던 어머니는 순천남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버스 안내양, 가발공장 공원 등으로 일했다.

이혼 후 어머니는 다시 성당에 다니게 되면서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되었고, 노동을 하면서도 시 쓰기를 놓지 않았던 고귀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1991년 당시에는 서울 가락동에서 요리사 일을 했었는데, 어머니 방에 놓여있던 노트 서너 권에는 기도문과 시들이 빼곡했다.

현재 어머니는 2014년 4월 26일에 경기도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 민주묘역에 이장되어 잠들어 계신다.

1995년 새 세상을 여는 천주교여성공동체 윤순녀 회장의 4주기 추모전례 추모자료집 '이정순(카타리나)님의 뜻을 기리며' 글 일부를 인용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나는 이정순님의 장례실행위원장으로 일하면서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했던 '이름 없는 여인'을 수없이 묵상했다. 참으로 세상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이 이름 없는 여인들이 오늘도 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온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마르코 14,9 : 마태오 26,13 : 요한 12,7)
덧붙이는 글 *모금계좌 : 농협 356-1492-0647-43 안영민(1991년 열사투쟁 기념사업회). 여러분들이 모아주신 마음은 1991년 열사들의 기록영상 제작과 30주년 종합다큐멘터리 제작에 사용됩니다. 모금에 참여해주신 분들은 종합 다큐멘터리 영화 엔딩 크래딧에 명단을 공개합니다.

*이 글을 쓴 공문정씨는 이정순 열사의 큰딸이고, 어머니를 추모하는 일을 하면서 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이정순 #1991년 5월 투쟁 #조곡동 성당 #노태우 정권 #연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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