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아버지 손문과 대한민국의 아버지 신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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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복을 통해 중국혁명 요인들을 차례로 만나게 되었다. 유창한 중국어와 해박한 식견 그리고 두 나라가 외세의 침략을 겪고 있는 동병상련이 서로 믿음을 갖게 만들었다. 서천보의 주선으로 송교인(宋敎仁)과 만나고 이어 황흥(黃興)ㆍ진기미(陳其美) 범광계(范光啓)ㆍ여지이(呂志伊)등 혁명당 간부들과 사귀게 되었다. 얼마 뒤에는 손문과도 만났다.
예관은 손문이 상해로 오자 다른 혁명당인들과 함께 손문을 만날 수 있었다. 손문은 일본에서 중국동맹회를 조직하고 일본의 지원이 필요한 입장에 있었으나 그가 영도하는 중국혁명 자체가 일종의 제국주의에 반항하는 민족복권운동이었다. 이 때문에 그 밖의 약소민족이 독립ㆍ해방을 쟁취하려는 일에 대하여 처음부터 무한한 동정과 지지를 해주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망하게 된 일에 대하여 의연히 엄하고 바른 비판 및 일관된 주장을 갖고 있었다. (주석 4)
중국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는 광서(光緖) 31년 손문의 영도 아래 기존 혁명단체인 홍중회(興中會), 화흥회(華興會)가 연합하고 광복회가 연계하여 일본 동경에서 성립했다. 구성원은 각 단체의 회원과 일본 유학생이 주류를 이루고 홍중회 조직이 핵심을 담당했다. 창립대회에서는 황흥(黃興)이 기초한 「동맹회장정(同盟會章程)」을 통과시키고 본부를 당시에는 동경에 두기로 했다. 또 손문이 총리에 추대되고, 하부 기관으로 집행부 평의부, 사법부를 두었다.
집행부는 총리가 통할하되 그 아래 서무과 등 6과(科)를 두었다. 서무과의 장은 황흥이 맡았다. 동맹회의 기본 강령은 손문이 제창한 '민족ㆍ민권ㆍ민생'의 삼민주의이며, 실천강령은 "구축달로(驅逐韃虜:만주족통치세력의 축출), 회복중화(恢復中華:한족 정권 수립), 건립민국(建立民國:민주공화국 건설), 평균지권(平均地權:토지제도의 공평화)"의 16글자였다.
동맹회 성립 이후 바로 무장 봉기를 실천에 옮겨 이듬해부터 평향(萍鄕)ㆍ유양(溜陽)ㆍ예릉(醴陵)의 농민기의를 시작으로 조주(潮州) 황강(黃岡)기의, 혜주(惠州) 칠여호(七女湖)기의, 진남관(鎭南關)기의 등을 일으켰다. 선통(宣統) 3년(1911)에는 전국 규모의 신해혁명을 이끌었으며, 민국 원년(1912) 국민당으로 개조되었다.
신규식은 개명한 신정이란 이름으로 중국혁명동맹회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무창기의(武昌起義)로부터 시작되는 신해혁명에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참여한다. 대한제국 무관학교 장교출신이어서 가능했다. 그의 신해혁명 참여는 이후 한국독립운동에 중국인과 중국정부의 지원받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은 엄청난 변혁으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청나라 선통(宣統) 9년(1911) 10월 10일 각지에서 민중소요가 전개되었다. 신해혁명의 발발이다. 당시 조정이 서구 제국주의 세력에 모든 이권을 팔아먹으면서 나라를 좀먹고 개인의 치부에만 몰두함에 따라 청조 타도를 목적으로 하는 봉기했다.
신축조약(辛丑條約)의 결과 중국이 서구 열강의 반(半)식민지로 전략했음에도 불구하고 청국의 통치자는 권력 유지에 몰두하며 사치, 부패 생활에만 빠졌다. 이에 따라 1905년 손문(孫文) 등이 혁명단체인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를 만들어 국내외에서 혁명역량을 키워나갔고 각지의 무장 봉기를 지원했다.
1911년 각지에서 보로(保路)운동이 일어나고 급기야 10월 10일 무창에서 혁명파에 의한 무창기의가 터지면서 신해혁명에 불을 지폈다. 무창에서 호북군정부(湖北軍政府)가 성립된 후 2개월도 되지 않아 전국 각 성(省)이 독립을 선포했다. 이듬해 1월 1일 혁명정부인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남경에서 탄생하고 손문이 임시대총통에 선출되었다.
그해 2월 손문은 청 황제의 퇴위를 조건으로 청 정부의 내각총리대신 원세개(袁世凱)에게 총통직을 양보했으며, 2월 12일 선통제(宣統帝)가 원세개의 강압에 의해 퇴위했다. 이로써 청왕조는 멸망했다. 그러나 원세개는 임시정부가 정한 임시약법(臨時約法)을 무시하고 독재를 휘두르는 한편 서구 열강 세력과 영합했으므로 혁명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2차 혁명(1913)으로 이어졌다.
주석
4> 신승하, 앞의 책, 6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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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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