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딸 업고 있는 전인자씨석구 엄마와 헤어진 1966년 즈음의 사진이다
전인자
1966년 즈음이었다. 스물셋의 희숙이 엄마, 전인자씨는 결혼 후 영월역 근처, 선일 여인숙에 방을 얻어 살게 되었다. 그러던 중 남편이 군대에 가게 되었고, 인자씨는 혼자 첫째 딸 희숙이와 이제 막 태어난 둘째 딸을 돌봐야 했다. 먹고 살 길을 찾아야 했던 인자씨는 마침 선일여인숙 주인의 권유에 구멍가게를 하나 차렸다.
"집주인이 먼 친척뻘이라며 나를 잘 대해줬어요. 일숫돈 2만 원을 빌려준 덕분에 구멍가게를 차릴 수 있었어요. 그 양반은 옆에서 담배를 팔았었는데, 어느 날 나한테 와서는, 한 달 1700원 가겟세를 내고 담배도 팔아보지 않겠냐고 했어요. 돈이 없다고 하니 자기가 도와주겠다고 해서 고맙게 생각했죠."
인자씨는 그렇게 또 5만 원을 빌려 담배 전표를 사 담배도 팔게 되었다. 빚이 7만 원이 되었지만, 다른 곳보다 가겟세가 싸서 좋은 기회라고 여겼다.
"그때 진달래 담배가 한 갑에 13원이었어요. 아리랑은 25원이었죠. 상록수는 30원, 파고다는 35원. 제가 팔았었으니 지금도 다 기억해요. 장수원이라는 담배도 있었어요. 담뱃대에 넣고 피는 거요. 아리랑이 제일 잘 팔렸어요. 역 앞 파출소 순경 하나가 맨날 진달래 한 갑씩 사 갔는데, 그래서 별명이 진달래 순경이었어요."
진로 소주가 2홉 들이는 20원, 4홉 들이는 35원 했다며, 인자씨는 약 55년 전의 상황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선일 여인숙 주인 유씨가 돈을 안 내고, 술안주와 담배를 가져가는 일이 잦아졌다. 수입도 없는데 외상값만 늘어가니 문제가 됐다. 유씨는 나중에 친구까지 데리고 와 자기가 보증한다며 마구 외상을 했다. 외상값이 7천 원이 넘을 즈음, 유씨가 집을 고쳐야 하니 방을 비워달라고 했다.
"그 소릴 듣고, 혹시 몰라 역전 파출소 앞에 가게를 하나 얻어 틈틈이 물건을 옮겨뒀어요. 그리고는 집주인에게 진 빚은 가게를 빼면 다 줄 테니, 외상값을 주면 나가겠다고 말했죠. 제가 그때 둘째를 낳은 지 한 달쯤 지났는데, 얼마나 서러웠는지 몰라요. 멸치 한 마리도 못 먹고 아이를 혼자 낳았었는데..."
며칠 후 갓난아이 젖을 먹이고 있는데, 유씨가 찾아와 왜 방을 안 빼느냐고 다그쳤다. 인자씨는 외상값을 주면 비우겠다고 하고, 유씨는 집을 비우면 외상값을 주겠다며 고성이 오갔다.
"주인 양반이 왜 말을 안 듣냐고 소리치더니 나를 막 끌어냈어요. 내가 막 버텼어요. 동네사람 들으라고 막 소리치자 구경을 왔어요. 그런데 집주인 딸이 오더니 자기 아버지를 욕한다며 나를 막 때렸어요. 정신없이 맞고 있는데 입에 뭐가 들어오길래 꽉 깨물었죠. 그 딸 손가락이었어요. 상해죄로 고발당했어요."
인자씨는 주인아저씨를 고맙게 여기고 살았는데 마지막이 그렇게 되었다며 그때를 회상했다. 인자씨는 집을 비워달라는 얘길 듣고 동네 사람들에게 외상값을 받을 수 있을지 묻고 다녔다. 그들은 돈을 받고 나가야 한다고 코치를 해주었다.
"호출장이 와서 파출소 갔어요. 내가 돈도 못 받고, 매도 맞았는데 어쩌냐고 했더니 순경이 맞고소를 하라고 알려줬어요. 그래서 지서를 찾아갔더니 담당 형사가 그러는 거예요. '상해죄는 죄가 무섭고 벌금도 많이 나온다, 전과도 남으니 합의를 해라'라고요. 나는 돈을 안 주면 합의할 수 없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외상값은 민사로 해결하라는 거예요."
옆집에 '유끼네'라고 부르던 집이 있었는데, 그 언니가 동네 사정에 밝았다. 인자씨 사정을 듣더니 형사하고 유씨하고 짜고 인자씨를 골려 먹으려는 거 같다며, 대소서(법무사)를 찾아가서 고소장을 쓰라고 조언해줬다.
"피 묻은 셔츠를 들고 대소서를 찾아갔어요. 자초지종을 듣더니 '아무리 억울해도 증인이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아는 동네 사람들을 찾아가 증인을 서달라고 부탁했는데, 사람들이 그 집 큰아들이 깡패라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며 안 나서 주는 거예요.
제가 가게에서 울고 있는데 그때 석구네 엄마가 다가와 왜 우냐고 묻더라고요. 사정을 말했죠. 그랬더니 석구 엄마가 바로 '희숙이 엄마, 그거 내가 해줄게' 그러는 거예요."
"희숙이 엄마, 그거 내가 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