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도 없는 곳에 강제이주... 사당동 철거민촌 역사

[동작민주올레-시즌2] 사당동 사람들의 주거권 쟁취 투쟁사①

등록 2021.06.14 10:52수정 2021.06.14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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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의 사당동(1967) 지금의 사당2동과 사당3동 일대는 '철거민 정착촌'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이전에는  산과 논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시골'이었다.  사진은 삼일공원 부지에 식수하는 장면.
1960년대의 사당동(1967)지금의 사당2동과 사당3동 일대는 '철거민 정착촌'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이전에는 산과 논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시골'이었다. 사진은 삼일공원 부지에 식수하는 장면.서울특별시
 
서울 사당동에 한강 이북의 서울시 철거민들이 이주하여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1965년부터였다. 사당동이 서울시에 편입된 게 1963년이니, 편입 직후부터 서울의 다른 지역에서 쫓겨난 철거민들의 정착촌 역할을 했던 셈이다. 당시 언론은 사당동에 이주한 철거민들이 사는 곳을 사당동 철거민촌, 사당동 정착촌, 사당동 철거민 정착지 등으로 불렀다.

서울시의 무대책 속에 형성된 '사당동 철거민 정착지'

서울시는 1950~1960년대 내내, 전쟁 직후의 피난민들과 농촌에서 이주한 사람들의 무허가 건축물로 골치를 썩고 있었다. 사당동이 철거민 정착촌 역할을 시작하기 직전인 1965년 당시 서울에는 무허가 건축물이 15만 4062동이었으며, 그 중 시유지와 국유지에 세워진 건축물이 8만 943동이었다. 이는 서울의 전체 주택수 32만 1123동의 거의 절반에 가까운 수치였는데, 단순 수치로 보면 서울시 인구 350만 명 중 170만 명이 무허가 건축물에 살고 있는 셈이었다.

사당2동의 경우 1965년부터 충무로·명동·양동·도동·대방동 등지의 철거민들이 이주하여 정착한 마을이 형성되었다.

1965년 10월 사당동에 정착한 첫 철거민들의 이주는 급작스럽게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서울시의 무허가 건축물 철거 계획은 특정 기한을 설정한 '자진 철거'를 요구했다가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강제 철거'를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서울역 앞 양동 판자촌 철거도 그렇게 이루어졌다. 자진 철거를 거부하던 주민들은 경찰이 강제 철거에 나서자 어쩔 수 없이 '자진 철거'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들을 수용할 예정지였던 사당동은 전혀 '준비'가 거의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305세대 1400여 명이 47대 트럭에 세간을 싣고 도착한 사당동은 천막은커녕 우물도 없고 나무만 있는 골짜기였다. 이주민들의 반발이 클 것은 당연지사. 서울시는 이번에는 이들을, 용산구 이촌동 택지조성지에 데려다놓고 떠나버렸다. 이들은 트럭에서 내리는 것을 거부하고 데모하기 위해 시청으로 향했지만, 기동경찰대에 막혀 그 자리에서 농성하며 밤을 새울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당시 조선일보의 보도(네온사인, 1965. 10. 13)에 따르면 서울시가 이틀 후 "부랴부랴 천막 30장을 구입, 우선 사당동에 급한 사람부터 수용시키고 변소와 우물도 곧 만들어줘야겠다고 뒤늦게야 부산을 떨며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것이라 철거 비용의 국고영달(예비비)을 상신하겠다'고" 했다니, 당시 서울시의 준비 상태가 어땠는지 알 수 있다.


당시 서울시의 '주먹구구'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첫 이주가 있은 지 2주 후에는 성북구 상월곡동 산1번지에서 강제철거를 당한 200여 명 철거민이 사당동으로 왔으나, 영등포구청에서 연락받은 바 없다며 이들을 퇴짜 놓는 바람에 다시 전에 살던 곳 들판에서 노숙을 한 뒤 다음날에야 사당동 정착지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 영등포구청이 일방적으로 내부방침을 정하길 '전에 이사 온 성북구 철거민들이 너무 사나워서 다시는 성북구에서 오는 사람은 받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발생한 해프닝이었다고 한다.

이곳은 수도가 없어 10분 거리에 있는 배나무골에 가서 물을 길어 먹었고, 버스는 30분을 걸어 흑석동 종점에 가서 타고 다녀야 했다. 1966년이 되어서야 서울시는 구호대책을 세운다고 부산히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그 내용은 '가구별 8평씩의 대지를 분배하고 5.5평씩 흙벽돌집을 짓게 하며, 35만원을 투입해 우물 5개를 증설하고 변소를 고치는 것' 등이었다. 집집마다 물지게가 없는 집이 없었는데, 물 한 지게에 20원씩 내고 길어 먹었다. 수도는 1981년부터 집집마다 설치되기 시작했다.


교육난에 교통난, 당시 사당동 사람들의 고충... 7명 익사 사고도
 
사당동 출근길 나룻배 전복사고를 전하는 언론보도(1969. 8. 9) 흑석동에서 사당동으로 넘어오는 도로는 한강 수위가 6.7m만 되어도 물에 잠겨 위험했다. 사당동 주민들은 도로를 높여줄 것을 요구했지만, 서울시는 이를 외면했다.
사당동 출근길 나룻배 전복사고를 전하는 언론보도(1969. 8. 9)흑석동에서 사당동으로 넘어오는 도로는 한강 수위가 6.7m만 되어도 물에 잠겨 위험했다. 사당동 주민들은 도로를 높여줄 것을 요구했지만, 서울시는 이를 외면했다.경향신문
     
처음 이곳에 이주한 철거민의 자녀들은 한동안 1시간이 넘게 걸리는 신동국민학교에 다녀야 했다. 1967년에야 남성국민학교가 생겼지만, 3부제 수업을 감내해야 했다.

사당3동에는 1968년 10월 동부이촌동과 서부이촌동의 철거민들이 삼일공원 부지로 대거 이주하면서 철거민촌이 형성되었는데, 불과 1년 만에 2천여 동의 무허가 건물이 들어섰다. 이로 인해 삼일공원 조성을 위해 심은 나무조차 다 뽑히고 만다.

이들의 원래 목적지는 경기도 광주대단지(현 성남시)였다. 그런데 광주대단지 조성이 늦어져 사당동 삼일공원 부지에 임시 거주하는 형식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1970년 봄까지도 광주대단지 부지 조성이 되지 않아 기약 없이 사당동에 머무르게 되자 이들은 서울시에 다른 적지를 물색해서라도 정착지를 마련해 줄 것을 서울시에 요구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서울에 새롭게 편입된 사당동, 봉천동 일대는 도시계획과 관련한 서울시의 아무런 사전 계획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도시가 형성되었고, 이로 인해 이후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던 것이다.

서울로 편입되기 무섭게 철거민 정착촌이 급격히 형성되면서 지방에서 몰려오는 이농민이 많이 찾는 곳 중 하나도 사당동이었다. 그에 따라 교통난도 심각한 상황이었다. '사당동 철거촌'이 형성된 후 처음에는 30분을 걸어서 흑석동 종점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했는데, 곧 버스노선이 연장되면서 사당동에서 대중교통을 곧바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흑석동에서 사당동으로 넘어오는 도로는 한강 수위가 6.7m만 되어도 물에 잠겨 위험했다. 사당동 주민들은 도로를 높여줄 것을 요구했지만, 서울시는 이를 외면했다. 비만 오면 이곳에는 80여 척 나룻배가 도선료를 받고 불법 영업을 하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서울시는 1969년 8월 9일 오전, 학생과 회사원 등 정원의 세 배에 달하는 20여 명을 태운 나룻배가 전복하면서 7명이 익사하는 사고가 발생한 다음에야 도로를 정비했다.

1974년에는 "(사당동) 주민 2000여 명은 출퇴근시간마다 심한 교통난을 겪고 있는데도 서울시가 현지 사정을 외면, 기존 노선버스마저 빼내는 등 주민들이 큰 불편을 겪고 있다고 주장, 이를 시정해달라고 서울시에 건의했다"는 기사도 등장한다. 사당동 주민들은 "사당동 일대 교통인구가 10만 명에 이르고 있는데도 사당동 종점을 오가는 일반버스 89번(범진여객) 40여 대뿐이며, 배차가 5분 간격이기 때문에 출퇴근 시간이면 혹심한 교통난을 겪고 있다"고 호소했다. "88번 보성운수 102번 상마운수 등 2개 노선버스가 사당동을 지나가기는 하나 난곡동 등지의 종점 손님으로 항상 초만원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사당동 주민들은 탈 수도 없"는 상황이라면서 버스노선 추가배정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 결과 1975년 3월 5일부터는 56번 서진교통 노선버스 연장운행(반포아파트까지만 오던 버스가 사당동까지 오고, 이후에는 신림동을 거쳐 서울대입구까지 연장 운행)과 288번 버스 등이 새로 사당동까지 운행하면서 교통난이 어느 정도 풀리게 되었다.

197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사당동 철거민'들의 철거반대 운동
  
1970년의 사당동 판잣집 철거 관련 기사(1970. 11. 11) 사당동 산22 일대는 1970년 8월부터 연고권을 노리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터를 닦고 무허가 건축물을 짓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결국 영등포구청과 노량진경찰서는 이들 산22 일대의 새롭게 들어선 무허가 건축물을 강제로 철거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부수고 짓고 부수고 짓고를 반복하는 숨바꼭질이 벌어진다.
1970년의 사당동 판잣집 철거 관련 기사(1970. 11. 11)사당동 산22 일대는 1970년 8월부터 연고권을 노리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터를 닦고 무허가 건축물을 짓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결국 영등포구청과 노량진경찰서는 이들 산22 일대의 새롭게 들어선 무허가 건축물을 강제로 철거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부수고 짓고 부수고 짓고를 반복하는 숨바꼭질이 벌어진다.경향신문
 
사당동이 판자촌의 대명사로 인식되면서 1981년에 한국을 방문한 테레사 수녀는 어린이날을 사당3동 판자촌에서 보내기도 한다. 1979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이기도 한 테레사 수녀가 불시에 사당동을 방문하자, 서울시 당국자들은 "판자촌의 실상이 외신을 타고 외국에 퍼질 경우 대외적으로 서울에 대한 인상이 흐려지는 게 아니냐"며 몹시 당황했다고 한다.

전두환 당시 대통령도 1981년 5월 22일 새벽에 사당3동 가마니골을 방문한다. 당시 전두환을 안내했던 정삼기 통장은 전두환의 "수돗물은 잘 나옵니까?"라고 묻던 자상한 모습과 "서민들의 살림살이를 직접 살펴보는 대통령의 행동철학에 절로 고개가 수그러졌"던 감격적인 기억을 다음해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상세히 밝히기도 했다.

사당동 철거지역은 198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는 주택문제 공약을 내세우는 대선후보의 단골 방문 지역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할 계획이다.

그런데 1980년대의 사당동 철거싸움만 기억하는 사람들은 의아해할지 모르겠지만, 사당동 무허가 주택 강제 철거의 역사는 1970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70년에 이르면 삼일공원 부지에 들어선 무허가 건축물과 사당동 산22 일대 국유지에 새롭게 들어선 무허가 건축물들로, 당시 영등포구청과 노량진경찰서는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특히 사당동 산22 일대는 1970년 8월부터 연고권을 노리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터를 닦고 무허가 건축물을 짓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결국 영등포구청과 노량진경찰서는 이들 산22 일대의 새롭게 들어선 무허가 건축물을 강제로 철거하게 된다. 이번에도 이후의 주거대책이 전혀 마련되어 있지 상황에서 이루어진 강제철거는 '부수고 짓고, 부수고 짓고'를 반복하는 숨바꼭질을 피해갈 수 없었다.

1970년 9월 3일, 1차로 73동의 무허가 건물을 철거하자 곧바로 그 4배에 달하는 무허가 건축물이 다시 들어섰고, 9월 23일 257동을 철거했다. 영등포구청과 노량진경찰서는 11월 5일부터 3일간 투석으로 맞서는 지역주민들에 대해 최루탄까지 동원하면서 5백여 동의 철거를 강행했지만, 하룻밤 사이에 2백여 동이 들어섰다고 한다.
11월 25일에는 철거민 2백여 명이 영등포구청을 찾아와 2시간 동안 농성을 하면서 대책마련을 요구하기도 했다.

애당초 무계획적으로 추진된 사당동 정착촌 사업을 어느날 갑자기 정비한다는 것은 말같이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사당동의 강제철거와 그에 맞선 지역주민들의 투석전 영등포구청과 노량진경찰서는 11월 5일부터 3일간 투석으로 맞서는 지역주민들에 대해 최루탄까지 동원하면서 5백여 동의 철거를 강행했지만, 하룻밤 사이에 2백여 동이 들어섰다고 한다. 11월 25일에는 철거민 2백여 명이 영등포구청을 찾아와 2시간 동안 농성을 하면서 대책마련을 요구하기도 했다.
사당동의 강제철거와 그에 맞선 지역주민들의 투석전영등포구청과 노량진경찰서는 11월 5일부터 3일간 투석으로 맞서는 지역주민들에 대해 최루탄까지 동원하면서 5백여 동의 철거를 강행했지만, 하룻밤 사이에 2백여 동이 들어섰다고 한다. 11월 25일에는 철거민 2백여 명이 영등포구청을 찾아와 2시간 동안 농성을 하면서 대책마련을 요구하기도 했다.조선일보
 
사당3동 일대는 1976년과 1977년, 1978년에도 한차례씩 강제철거가 있었다. 우선 1976년 5월에 17동 24세대의 철거가 있었다. 이 중 12세대는 인근 '한전 택지조성지'의 땅을 매입하여 연립주택을 건립하였고, 나머지 절반은 뿔뿔이 흩어졌다.

1976년 10월 450세대에 철거 계고장이 나오자 철거대책위를 구성한 주민들은 서울시의 협조를 얻어 산45번지에 땅을 매입하여 '성지 새마을 연립주택'을 조성한 후 자진 철거하였다. 1977년에는 여름철 붕괴위험에 따른 해발 70m 이상 고지대의 주택 철거방침으로 24통~27통 일대의 철거가 있었고, 1978년에는 산17번지와 산22번지 일대(19통~23통)의 철거가 진행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1980년대의 사당동 철거 싸움의 역사는 준비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다음편에는 사당동 철거 싸움의 역사 2편이 이어집니다.
#사당동 #철거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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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동작구 근현대 역사산책>(2022) <현충원 역사산책>(2022), <낭만과 전설의 동작구>(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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