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린것보다 더 거두게 하는 섭리모종 1-2달 후 식탁을 탐스럽게 해주는 열매들
박향숙
남편은 오이는 구부러지지 않게 돌보고 장대 사이사이에 줄 사다리를 놓아 고추 대가 크기 전에 충분히 햇빛을 받도록 하는 등 정성을 다했다. 첫 오이를 수확하기 전날에도, 남편은 사진을 찍어 와서 "첫 작품은 당신 손으로 따야지"라고 말했다.
오이를 따기 시작한 날부터 텃밭에 갈 때마다 누구와 나눠 먹을까를 생각했다. 올해 봉사활동으로 시 필사를 도와주는 지인들을 포함해서, 식구들, 성당 어르신들, 내 동네, 김밥집 사장님, 문구점 사장님들, 문인화 스승님까지 골고루 나눴다.
어느 날 필사팀의 정연샘은 내가 준 오이를 가지고 장아찌를 담가 왔는데 평소 채소를 잘 먹지 않은 남편도 정말 맛있게 먹었다. 속으로 별일이네 하면서 언젠가 만들어 줘야지 싶었다.
'여름날 저녁놀은 부끄럼 타는 새색시 볼 같다'라고 한 마디 던지니, 남편의 운전대가 가볍게 춤을 추었다. 텃밭 역시 무르익은 열매들, 무르익을 열매들로 곁을 스칠 때마다 열매들의 외마디가 들리는 듯했다. '나를 좀 봐주세요'라고.
고추 장아찌를 담고 싶다던 지인이 생각나서 고추도 한 바구니 가득 담고, 가지도 10여 개 거두었다. 방울 토마토가 무더기로 영글어서 줄기가 축 늘어져 있었다. 틈새로 들어가 한꺼번에 쓸어담다시피 해서 토마토를 챙겼다.
가장 많이 나를 기쁘게 했던 오이 잎이 누렇게 까실거렸다. 이제는 물을 아무리 줘도 더 이상 돌려줄 게 없다는 신호였다. 참 많이도 따다 골고루 나눠 먹었지. 아래쪽을 보니, 기다린 듯 큰 것 작은 합해, 예닐곱개의 오이가 보여서 장바구니에 담았다. 나도 한번 장아찌를 담가 봐야지. 새콤달콤하게 알록달록하게 담가서 오롯이 나와 남편을 위해 먹어야지. 아, 정연샘도 한 병 줘야지.
집에 오니, 서울 사는 동생이 왔다고, 아무리 바빠도 밥 한 끼 먹자고 했다. 생각해보니, 내 동생만 오이 하나도 못 먹였네 싶었다. 장아찌 담가준다고 하니, 먹을 것 많이 줘라고 애교를 부렸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동생 부부는 코로나 이후 일반인보다 훨씬 더 많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가족 간의 나들이 역시 아주 오랜만의 행사라 뭐든지 싸 주고 싶었다. 새벽 5시에 눈이 떠졌다.
"그래, 이번에는 사랑하는 내 동생을 위해서. 세상이치 참 묘하네. 이번 오이도 주인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내가 어젯밤 열심히 요리사 K씨의 쿠킹 영상-장아찌 맛있게 담는법-을 보길 잘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