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
넷플릭스
같은 옷, 같은 식사, 같은 잠자리, 공정하게 주어지는 번호 선택의 기회, 과반이 원치 않으면 게임을 중단시킬 수도 있는 '민주적' 시스템, 게임을 사전에 유출해 공정의 원칙을 위배한 자와 거기에 협력한 자 모두 제거될 만큼 철저한 '평등'의 규칙으로 게임은 굴러간다.
패자에겐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도 제 발로 다시 찾아든 사람들. 그들을 이 미친 게임으로 밀어 넣은 것은 한 조각 희망도 찾을 수 없는 지옥이 된 세상이다. 이 게임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이들에게 이 '공정'하고도 잔인한 게임판을 제공하고 뒤에서 웃고 즐기는 자들이 바로 그 지옥의 설계자들이란 사실이다.
일상이 된 디스토피아
2008년엔 기괴하게 느껴져 퇴짜맞았던 시나리오가 2021년 9월 방영 2주 만에 넷플릭스가 있는 모든 나라에서 1위를 차지했다. 그 사이 어떤 일이 있었을까?
감독은 2008년에 대본을 처음 썼다고 밝혔다. 그의 첫 장편영화 <마이 파더>(2007)가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두고 내려온 뒤였다. 빚을 졌고, 패자에게 냉정한 한국의 자본주의의 속성상 감독으로서의 앞날도 불투명했다.
그는 서바이벌 게임을 다루는 영화나 만화를 보며, 자신도 이런 게임에 참여하면 어떨까 상상했다고 한다. <오징어 게임>의 상우처럼, 서울대를 나오고 최소한 동네 천재로 추앙받는 유년을 누렸을 그가 빚에 짓눌리던 자신을 만화로 간신히 부스팅 하면서 쓴 대본이 바로 <오징어 게임>이다. 불닭볶음면 맛의 얼얼한 일상이 굽이굽이 무심하게 펼쳐지는 한국 사회는 그래서 희로애락의 진미가 바글바글 끓는 훌륭한 서사의 재료이기도 하다.
2008년은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해다. 그의 당선은 많은 이들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예고했다. 이듬해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바위에서 몸을 던졌고, 꺼이꺼이 울며 그를 보낸 김대중도 뒤를 따라갔다. IMF 구제금융 체제를 신속히 극복한 조국에 가슴 벅차던 기억이 선연하건만, 그 무렵 우린 '헬조선'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기 시작했다.
대본이 쓰인 지 12년이 지난 2020년 지구촌 구석구석은 바이러스 공포에 뒤덮였다. 영화, 만화, 소설로 수차례 보아왔던 일이 현실 버전으로 전개되었다. 매일, 먼 나라에선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방송 보도가 숨 가쁘게 이어졌고, 사람들의 심장은 두려움으로 얼어붙기 시작했다. 온 세계가 바이러스로 전시 체제에 돌입했다. 민주주의, 인권 따위는 죽음의 공포 앞에 멈춰 섰다. 모든 사람이 마스크를 쓰고 다니고, 학교가 폐쇄되고, 도시는 봉쇄되었으며 일거수 일투족이 감시되는 것이 당연해졌다.
마스크 속에 서로의 존재를 가두며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 소외되었다. 접촉이 범죄가 되고 타인이 위협이 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기꺼이 서로의 감시자가 되었다. 그런 지옥 같은 현실에서 하나의 희망의 밧줄이 내려졌으니 그것은 백신이었다. 급히 제조되어 임시 허가를 달고 나온 백신의 위험을 지적하는 소리도 있었지만, 다수의 사람은 지옥을 암울하게 견디느니 백신이란 밧줄을 타고 탈출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많은 이들이 1차, 2차를 통과했으나 고대했던 해방의 그날은 눈 앞에 펼쳐지지 않았다. 대신 3차가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