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1월 18일 군산 월명운동장에서 유세하던 당시 김대중 평민당 후보
조종안
평민당은 여소야대 정국에서 제1야당이 되었고, 소속 71명의 국회의원은 선명한 투사형이 많았으며 재야에서 선발된 반독재 투쟁의 전위가 다수 포함되었다. 대선에서 3위라는 치욕적인 패배를 겪었지만 총선을 통해 화려하게 재기할 수 있었다.
평민당이 대선패배와 야권분열이라는 원죄를 뒤집어쓰고 제도언론의 불공정한 보도에서도 총선에서 제1야당으로 부상한 데는 재야인사들의 입당과 공천ㆍ당직 등에서 얻은 성과가 적지 않았다.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선언하고 그를 지원했던 문동환ㆍ박영숙ㆍ서경원ㆍ양성우ㆍ박석무ㆍ김영진ㆍ이철용ㆍ이상수ㆍ정상용ㆍ이해찬 등 97명의 재야인사가 1988년 2월 3일 민주적 국민정당 건설과 올바른 정책정당을 육성한다면서 평민당에 입당하였으며, '평화통일연구회(이하 평민연)'를 결성하여 당내에서 자율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집단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지역구 및 전국구에 23명이 출마하여 15명이 당선되어, 의회에 진출함으로써 재야 운동세력의 합법적 정치활동의 기반을 열었다. 이는 평민당 당내 의원 71명 중 21.1%를 차지하는 상당한 것이었다. (주석 1)
평민당이 공천한 재야인사 중 지역구로는 강금식(성동갑), 임채정(노원을), 김학민(서대문 갑), 이상수(중량갑), 이해찬(관악을), 고광진(동대문을), 이철용(도봉을), 양성우(양천갑), 김용석(인천북구갑), 이찬구(성남을), 권운상(구리), 송진섭(안산), 장순식(평택), 장동찬(예산), 서경원(영광ㆍ함평), 박석무(무안), 김영진(강진ㆍ완도), 유인학(영암), 박상천(고흥), 정상용(광주서갑), 오탄(전주갑) 등 21명이 출마하여 강금식, 이상수, 이해찬, 이철용, 양성우, 이찬구, 서경원, 박석무, 김영진, 유인학, 박상천, 정상용, 오탄 등 13명이 당선되고, 전국구로는 박영숙(전국구 1번), 문동환(전국구 12번)이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평민당 초기에 평민연 출신 재야입당파는 상임고문(문동환), 부총재(박영숙), 중앙정치연수원장(임채정), 대외협력위원장(이길재), 기획조정실장(이명준), 인권위원회 부위원장(오대영), 사무차장(이경배), 부대변인(장영달), 중앙정치연수원 부원장(유시춘), 정책실 부실장(고광진), 당보부주간(김학민) 등 주요당직을 맡았으며, 각 실ㆍ국에 26명의 회원이 참여하였다. 특히 정치연수원을 맡은 평민연은 평민당 초기 2년동안 체계적인 당원교육프로그램인 '평민대학'을 만들어 총 10기에 걸쳐 1,200여 명을 교육시켰으며, 대외협력위원회를 줄곧 맡아 재야운동과의 연대의 폭을 넓히고 사회적 요구를 당의 정책에 반영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주석 2)
1988년 5월 7일 평민당은 임시 전당대회를 열어 김대중 전 총재를 다시 총재로 추대하고 박영숙 의원을 부총재로 선임하였다. 김대중은 총재직 수락연설에서 자신과 평민당의 위상과 진로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비록 제1야당은 됐으나 의석은 총의원수의 4분의 1도 못된다. 사상 처음 있는 소수여당의 상황 아래서 우리가 짊어진 책임은 의석수 비중보다 훨씬 더 크고 무겁다.
소수지만 제1야당으로서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정국을 주도해야 할 미묘한 현실을 잘 감당해 낼 수 있을지 염려되는 바 있다. … 우리는 그들(노태우정권)과 진지한 대화를 통한 정치발전의 새로운 장을 펼쳐나갈 용의가 있다. (주석 3)
평민당은 13대 국회를 대화와 투쟁이라는 양날의 칼을 활용하겠다는 뜻을 갖고 있었다. 4당 정립의 구조에서 다른 야당과 협력과 연대 없이는 아무런 일도 하기 어렵고, 이와 함께 김총재와 평민당이 추구해 온 가치와 선명성을 확보하고 지켜나가는 일도 중요했다.
무엇보다도 정국 대처방법은 '대화'로 표명됐지만 그 대상의 상당 부분은 자칫 대화가 배제되기 쉬운 민감한 권력관계 사안들이다. 김총재가 13대 국회의 과제로 제시한 △ 광주사태 진상조사 △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 부정축재 조사 △ 경찰중립화 △ 국가보안법 등 개폐 △ 안기부ㆍ보안사의 정치개입 종식 등이 그것이다.
또한 이같은 사안들을 다뤄가면서 평민당 외곽의 '강경' 목소리를 어떻게 수용, 소화하느냐도 큰 숙제다. 요컨대 김총재와 평민당이 쏟아놓은 수많은 공약들을 '대화'라는 또 다른 공약으로 어떻게 실현해 내느냐가 과제인 셈이다. 정치력이 요구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주석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