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노 3김 제13대 대선 벽보(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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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야당은 검찰수사를 '축소지향'이라고 비판하면서, 5공핵심 6인, 즉 정호용(광주항쟁 당시 특전사령관), 이원조(5공시절 은행감독원장) 의원 및 이희성 주공이사장(광주항쟁 당시계엄사령관)의 공직사퇴와 장세동, 허문도(언론탄압), 안무혁(양대선거 당시 안기부장으로 선거부정 관련) 3인의 사법처리를 강력히 요구했다.
5공청산 작업은 11월 3일 5공특위의 가동 및 청문회 활동 등으로 이어졌다. 언론사상 최초의 생중계로 진행된 '5공비리' '광주문제' '언론문제' 청문회는 상상을 초월하는 비리와 음모를 부분적으로 나마 폭로, 국회기능을 활성화시키는 동시에 밀실정치를 공개정치로 유도하고 대중의 정치참여를 높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으나, 증인들의 위증과 후속조치 미흡 등 많은 문제점으로 남겼다.
다섯 차례에 걸쳐 진행된 '일해재단청문회'는 장세동과 정주영 등을 증인으로 소환, 기금모금의 강제성, 정경유착의 실태, 청와대경호실과 보안사 등 권력촉수의 전횡 등을 폭로 했다. 11월 18일부터 광주학살 피해자를 비롯, 김대중ㆍ이희성ㆍ정호용 등 65명의 증인을 출석시켜 6차례에 걸쳐 진행된 '광주민주화운동 청문회'는 5ㆍ17비상계엄확대 조치의 불법성, 공수부대 지휘책임, 발포책임자, 정확한 사망자 수 등은 끝내 밝히지 못했다. '언론청문회'는 11월 21일부터 허문도ㆍ이상재ㆍ허삼수 등을 소환, 언론인 숙정ㆍ언론통폐합 등이 신군부의 언론장악 음모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혀냈다.
청문회를 통해 각종 비리가 폭로되는 한편 전두환 친형 전기환, 처남 이창식 등 친인척이 잇따라 구속됨으로써 여론이 극도로 악화되자 전두환은 11월 23일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 정치자금 139억 원과 연희동 사저 등을 국가에 헌납한다고 밝히고 강원도 백담사로 쫓겨가듯이 은둔했다.
그러나 노 정권은 야당 주장의 5공핵심 6인의 사법처리를 비롯하여 청문회에서 드러난 각종 비리의 처리에 대한 비협조적 태도, 문익환ㆍ황석영ㆍ서경원 등의 방북사건, 울산사태 등 잇단 사건으로 '공안정국'을 조성하여 5공청산 작업을 크게 위축시켰다. 특히 5공 핵심 6인 처리문제에 관해 김영삼ㆍ김종필이 3야 총재의 합의선에서 후퇴, 민정당 쪽에 기욺으로써 야 3당 공조를 흔들고 5공청산의 걸림돌로 작용했다.
야권공조체제가 무너지면서 5공청산작업은 지지부진해졌고, 89년 12월 15일 청와대 영수회담 끝에 ① 전두환의 1회 국회증언 및 녹화중계 ②정호용ㆍ이희성의 공직사퇴, 이원조의 고발 ③광주시민의 명예회복 및 보상을 위한 입법추진 등 11개항의 타협안에 여야가 합의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진 12월 31일의 전두환 국회증언은 광주의 발포를 '자위권발동'이라고 강변하는 등 변명으로 일관, 야당의원들의 야유와 폭언 속에 파행적으로 끝났다. 이로써 국민의 여망을 담은 5공청산작업은 큰 성과 없이 흐지부지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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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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