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기아차 직접 고용 촉구 단식 농성중인 김수억
정택용
5년 6개월이랍니다. 22년 6개월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김수억을 한 3년은 못 보게 될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눈물 겹습니다.
김수억을 처음 만난 건 2012년 서로 '빵살이' 끝나고 나온 후였습니다. 저는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건으로 보석 신청이 받아들여져 나왔을 때였습니다. 전 몇 개월 안 되는 한참 짧은 살이였지만 그는 한참 긴 살이였습니다. 그는 비정규직 최초로 기아자동차 라인 점거 파업 책임을 지고 들어가 2년 6개월여 수감생활을 마치고 나온 후였습니다.
첫 빵살이도 아니었습니다. 1995년 학생 시절 '전두환·노태우 광주 학살자 처벌하라'라고 외치며 싸우다 첫 구속되어 감옥에 살다 나왔다고 했습니다. 김영삼 때였습니다.
2005년에는 현대기아차 화성공장에서 최초로 비정규직 노조 만들었다는 까닭으로 두 번째 구속되어 살다 나왔습니다. 2007년부터는 1년 6개월 동안 공장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수배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노무현 때였습니다. 2009년 1월 구속되었을 때는 이명박 때였습니다.
첫인사도 거리였습니다. 서울시청 건너편 대한문 앞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희생자 합동분향소였습니다. 당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중에서 스물 두 번째 희생자가 나온 후 더 이상 사람들이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지 않냐고, 서울시청 건너편 대한문 앞에 분향소를 차리고 다시 한번 이명박 정부와 격돌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친구들이 꼭 김수억을 만나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감옥에서 희망버스 운동을 보며 가슴이 뛰었다고 했습니다. 참 겸손하고 진지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금세 죽이 맞았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민주노조 파괴 공작이었고, 박근혜 정부는 노동법 전면 개악이었습니다.
이명박 정부 시절 민주노조 파괴 시나리오의 최대 격전지 중 하나는 충북 영동과 아산에 1, 2공장이 있던 유성기업이었습니다. 당시 청와대, 국정원, 검찰, 경찰, 그리고 유성기업의 최대 납품처인 현대차 재벌 등이 공모해 유성기업 민주노조 죽이기에 나섰습니다. 세월이 흘러 국회 국정감사, 검찰개혁위원회, 경찰청 과거 인권침해 사건 조사위 등을 통해 그 전모의 일부가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그 유성기업 노동자들의 고공농성을 엄호하기 위해 함께 도원결의해 '유성기업 희망버스' 운동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그마한 꼬투리만 잡혀도 가중처벌을 당해야 하는 누범 기간 중이었고, 나는 재판 중에 보석으로 가석방된 상태였지만 함께 총대를 메기로 했습니다.
2014년 세월호 참사가 나고는 박근혜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다시 의기투합했습니다. 그는 '세월호를 기억하는 노동자 모임'을 결성해 전국의 노동자들이 모여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그 진실을 규명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잊지 못할 그날 밤
2014년 5.18 하루 전인 5월 17일의 밤은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추모행진 과정에 종로2가 피카디리 극장 앞에서 추모대열을 벗어나 박근혜가 있는 청와대를 향해 가기로 했습니다. 3000여 명이 동시에 뛰기 시작했습니다. 간발의 차이로 동십자각 바로 앞 현대차 정문 앞에서 몰려든 경찰 저지선에 가로막혀야 했습니다.
이만 돌아가자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우리는 세월호에서 죽어간 이들의 비명을 기억하며 끝까지 연좌하기로 했습니다. 긴 대치 끝에 경찰이 사람들을 연행하기 시작했습니다. 난 다음날인 5.18 세월호 추모대회에서 동을 뜨기로 했던 걸 핑계로 등을 보이며 뛰어야 했습니다. 김수억은 연행되었습니다.
어느 집 기와 담장을 뛰어넘었던가 봅니다. 그 낯선 가정집 창고로 숨어 들어가 숨죽이고 있는 동안 밖에서는 진압하는 소리, 끌려가는 사람들의 비명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날 그 자리에서 108명이 연행되었습니다. 진압이 모두 끝난 후 혼자 '살아남은 자'가 되어 뛰어내리며 다친 다리를 절뚝거리며 네온사인 휘황한 종로 거리를 거쳐 대책위 사무실로 가던 그날의 참담함을 나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입니다.
다음날 5.18 세월호 추모대회에서는 67명이 연행 당했지만 우리는 전날 연행 당해 경찰서 유치장에 있는 이들을 생각하며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사흘 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친구들이 모두 잡혀 들어간 '세월호 만민공동회' 사무실에서, 보도자료를 내고, 규탄 성명을 내고, 민변과 상의해 연행자 접견단을 꾸리는 등 끌려간 동지들, 시민들 지키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저 또한 5월 27일 추모대회 때 종로2가 보신각 앞에서 경찰과 대치하며 방송차 위에서 마이크를 잡고 있다 결국 연행되면서 조금의 미안함은 덜었습니다.
5년 만에 김수억은 간신히 복직이 되어 작업복을 입고 그리운 동료들 곁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5년 만에 받은 첫 월급을 모두 털어 김수억은 노구에도 젊은 우리들과 함께 모든 현장을 함께 지켜주시던 백기완 선생을 모시는 스승의 날을 열어 주었습니다. 정규직 복직 약속을 하고는 다시 먹튀 한 사측에 맞서 12년째 싸우고 있던 기륭전자 비정규직들이 점거하고 있던 기륭 신사옥 안에서였습니다.
"니들이 진짜 나의 친구들"이라며, 정말 고맙다며 굵은 눈물 뚝뚝 흘리시던 선생님과 그 곁에서 상기되어 함께 눈물을 참지 못하던 김수억을 잊지 못합니다.
늘 대열의 맨 앞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