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전교조해직교사의 법적 지위에 관한 최초의 국회토론회(2018.11.27)
정도원
대구지부 결성식 전날인 6월 10일 토요일 12시 반 경 나를 불법연행·감금하기 위해 남부경찰서, 송현파출소, 달서구청, 달성교육청, 달서우체국, 심지어 서부수도사업소 직원을 포함해 총 13명(하도 어이없는 일이라 일부러 찬찬히 세어보았다.)의 공무원이 동원되었고, 채 귀가하지 않은 아이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경찰차에 태워졌다.
아마도 이들은 내가 없으면 대구지부 결성대회가 치러질 수 없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이 나라 관료들이나 수구보수세력들은 걸핏하면 핵심이 누구인지, 배후세력이 누구인지를 캐내려는 못된 DNA가 있다. 마치 일제시대 밀정이 독립운동가를 심문하듯이. 웃기는 발상이다. 88년 신학기 초 학교에서 성적 우수생들을 따로 모아 특설반 자습실을 운영하는 것에 저항하여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시위를 벌일 때, 교감이란 사람은 배후세력이 정도원 선생이라 소문을 내었단 얘기를 전해 들은 바 있다.
지난 5월 초 치안본부의 좌경의식화 사건 단식수업 때도 재향군인회 사무실이라면서 단식저항 중인 내게 전화를 걸어와 너의 배후세력이 누군지를 분명히 밝히라고 협박하였다. 그들은 단결과 연대의 의미를 모른다. 살면서 단 한번도 경험해보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남부서 형사들은 한 마디도 내게 배후세력이 누구인지를 묻지 않았다. 아마 이들은 내가 대구교협의 핵심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 한 명을 납치하려고 13명의 공무원이 동원된 사실을 설명해낼 재간이 없다.
기가 찰 노릇이다. 촌놈 출신인 내가 뭐라고? 노태우, 박철언, 정원식, 서동권, 강민창, 이런 권력자들의 국가운영 수준이 기껏 이 정도인가. 이 한심한 나라의 교육자, 교사인 나는 무엇인가. 내 가르치는 아이들을 제대로 된 민주시민으로 가르쳐 이 야만의 사회를 민주사회로 바꾸어내는 것 외에는 어떠한 방법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경북대 사대부고 맞은 편에 위치했던 대구 남부경찰서에는, 자신들의 말에 따르면 나를 담당하는 형사가 서너 명 있었다. 태권도 4단의 서 형사, 유도 4단의 유 형사, 주로 운전대를 잡는 젊은 김 형사가 그들이었다. 아마도 당시의 무도경찰 출신들인 것 같았다. 이 중 젊은 김 형사는 날 존경한다고 했다. 직업이 경찰이라서 어쩔 수 없으니 양해해 달라는 말을 두 차례나 했다.
구미 금오호텔 커피숍으로 보신탕 집으로 구미역전의 그 여관으로 다방으로 30시간 동안 불법연행·감금되었다가 이튿날 오후 5시 반 경 풀려났다. 안지랑서 서부정류장까지 터벅터벅 걸어왔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판사의 영장없이 지들 맘대로 납치하다시피 인신을 감금하는 '48시간 임의동행'이란 관행이 있는지 모르겠다.
이건 헌법에 보장된 신체의 자유를 정면으로 위배하는 짓이다. 헌법의 학문, 양심, 즉 사상의 자유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국가보안법처럼. 이런 걸 눈감고 있는 정부는 촛불정부가 아니다.
3년 반동안의 전임상근자로 활동하는 동안 헤아려 보니 꼭 10차례 대구와 서울의 거의 모든 경찰서 유치장에서 밤을 새웠다. 십년 전만 하더라도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다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나이가 드니 이젠 머리 속에서 희미해졌다. 즉결에 회부되고, 검찰에 폭력혐의로 송치되어 새파랗게 젊은 검사에게 훈계 듣던 일, 최루탄에 무릎을 맞아 화상을 입어 수년 간 새까만 흉터가 남아있던 일, 백골단의 방망이와 전경들 시교육청 직원들과 벌였던 몸싸움에 이르기까지, 말싸움이 아니라 몸싸움이었고 전쟁같은 세월이었다.
해단투 때 서울 양천서에서 불법 연행되어와 구류 중에 수사과장과 말싸움하다 전경들에 의해 대기실에서 유치장으로 들려나가는 내 다리를 잡고 울고불고 소리치며 기어이 나 몸둥아리를 빼앗아내던 해직동지 여선생님들의 아우성을 결코 잊지 못한다.
이는 공권력 더 정확히는 국가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내 신체의 자유가 침훼당하고 자존심이 구체적으로 훼손되는 치떨리는 싸움의 현장이었다. 35년 동안 전교조 운동의 체험은 부당한 권력은 물론 정당한 권력의 어떤 부당한 행사에도 굴하지 않고 저항해야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다, 는 내 나름 세상살이의 지식으로 지혜로 남아 있다.
지난 9월 2일 청주지법 재심 선고공판에서 충북 강성호 동지는 원심파기라는 승소판결을 받아냄으로써 30여 년 가슴에 새겨져온 '북침설 교육을 한 빨갱이 교사'라는 붉은 화인을 다행히 걷어내게 되었다. 인사말을 하는 교육민주화동지회 황진도 회장의 음성이 조금 떨리다가 끝내 잠시 멈추었다. (관련 기사 :
'빨갱이' 누명 벗은 교사 "담임·교감·교장은 사과하라" http://omn.kr/1v3kp)
바로 곁에 섰던 나도 따라 울컥했다. 내게는 강 선생의 아픔이 동병상련이었다. 긴 세월 그는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아왔을까. 일제가 독립지사를 때려잡기 위해 만든 치안유지법을 본떠서 만든 국보법, 그 국보법이 이 땅에 시퍼렇게 살아 두더지처럼 웅크리고 있다가 좀비처럼 이따금 출몰하는 한, 이 나라는 자유민주주의도 민주공화국도 아니다. 그냥 야만의 사회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