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가 주최한 제67주년 독도대첩기념 및 독도의용수비대 영령 추모식 포스터
국가보훈처
하지만 개인이 군대를 꾸리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마침내 마지막 남은 재산까지도 수비대 유지에 날려버린 홍순칠은 자신들의 업무를 정부에서 맡아주길 계속 요청했다. 하지만 정부는 근무환경이 너무 열악하다고 난색을 표했고 배속된 경찰들은 근무를 거부하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일본의 항의가 거세짐에 따라 한때 홍순칠이 '해적'이라는 주장이 제기, 주한미군이 체포해 한국 정부에 인계하기도 했다.
수비대는 일본과의 교전 중에선 사상자가 없었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전달한 위문품을 받는 과정에서 위문단 한 사람이 놓고 온 카메라집을 가져다주던 중에 허학도 대원이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또 수비대원들이 지낼 막사와 계단 등을 만드느라 허위로 징용 영장을 만들어 울릉도의 목수와 기술자들을 불법으로 징용, 수비대 기지를 만들었는데 이 과정에서 기술자 몇 명이 사고로 목숨을 잃기도 했다. 또 군자금의 부족이 심각해 제주도 해녀들을 불러 해물을 채취해 팔아서 군자금을 마련하려 했지만 인건비도 나오지 않을 정도라서 그만두어야 했다.
1956년 독도수비대는 기존의 업무를 국립 경찰에 넘기고 사실상 임무를 마쳤다. 그러나 이후에도 이들 수비대원들은 독도 방파제 설치를 정부에 건의하는 등 다양한 형태의 독도 지키기 및 독도 가꾸기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969년, 1972년 독도개발계획서를 경상남도에 제출하며 실효적 지배를 강화하도록 재촉했으나, 당시 일본의 눈치를 보던 위정자들은 점차 수비대를 눈엣가시로 보기 시작했다. 결국 홍순칠 대장은 1974년 12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사흘 동안 고문을 당했다. 중정의 요구는 더 이상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떠들지 말라'는 것이었다. 다시는 글을 쓰지 못하도록 그의 오른손을 부러뜨리기도 했다고 부인 박영희 여사가 전했다. 그가 이런 고초를 겪었음에도 언론은 정권의 통제로 이를 보도하지 못했고, 훗날 국정원과거사위나 진실화해위에서도 거론되지 않았다.
또 전두환 신군부는 1980년대 초 그가 독도 지킴이로 북한 방송에 소개되자, 그를 즉각 체포해 극렬한 고문을 가해 간첩 조작을 하려 했다. 결국 고문 후유증으로 홍 대장은 1985년에 서울로 이주했고, 1986년 폐암으로 숨졌다.
한국 정부는 이들의 공로를 인정해 1996년 4월 고 홍순칠 대장에게 국가보훈 삼일장을, 나머지 대원에게 보국훈장 광복장을 수여했다. 2005년에는 독도의용수비대 지원법이 제정됐고 이 법을 토대로 2008년 독도의용수비대 기념사업회가 공식 출범했다. 사업회는 수비대의 공적을 알리고 생존 대원과 유족에 대해 지원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홍순칠 대장 등 17명 대전현충원에 안장
2014년 11월 21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는 '제60주년 독도대첩 기념식 및 독도의용수비대원 합동 안장식'이 거행되었다. 개별 묘역에 안장돼 있던 홍순칠 대장을 비롯한 대원, 배우자 등 17위가 안장되었다. 현재 독도의용수비대원 총 33명 가운데 17명은 대전현충원(2명 사병묘역), 4명은 영천호국원, 6명은 개별묘역에 안장됐으며, 5명은 생존하고 있다. 이들 중 미확인된 인원은 1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