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시간 단축 발표 기사2017년 12월 신세계 그룹은 노동 시간을 하루 1시간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SBS
책 속 H그룹 B대형마트는 노동 시간 단축 이후에도 인력 충원을 하지 않아 노동자들은 아파도 휴가를 내지 못했다. 일이 줄어들지도 않아 노동력 부족이 훨씬 심해졌다. 회사는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기 위해 준비 시간을 줄이고, 노동 시간을 무작위로 배치했다. 일하는 시간은 줄었지만, "휴식도 건강도 계획할 수 없는 조각난 시간"만 남게 됐다(<시간을 빼앗긴 여자들>, 245쪽).
<시간을 빼앗긴 여자들>은 여성 노동자, 특히 중년 여성 노동자의 노동 현실이 지니는 차이와 복잡한 의미도 세심하게 들여다 보려고 노력한다. 아직도 여성들에게 노동은 높은 진입 장벽으로 인해 일할 권리를 위한 투쟁의 대상이다. 노동자의 지위를 획득한 이후에도 임금과 승진 기회에 차별이 존재하고, 노동 과정과 결과에 대한 편견과 평가절하가 따라다닌다. 중년 여성들에게는 '아줌마'라는 표현이 보여주듯 추가적인 선입견과 부담이 덧붙여진다.
"남성노동자에게 마트에서 바라는 자질이 물리적인 힘과 고객에게 주는 신뢰라면, 여성노동자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엄마의 자질'이다. 마트는 여성노동자가 남편과 자녀를 상냥하게 뒷바라지했던 것처럼 고객에게 상냥하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집을 언제나 깔끔하게 청소하고 유지했던 것처럼 매대를 깔끔하게 정리하기를 기대하며, 이를 강조한다." (<시간을 빼앗긴 여자들>, 94-95쪽)
중년 여성에게 일은 단순히 돈을 버는 수단에 머물지 않는다. 일은 '가정 중심형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주체적 삶을 위한 디딤돌이며, 동료들과 직장에서 이야기하며 '사회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활동이다.
"중년여성 노동자들은 동료들과의 사회생활과 노동조합에서의 주체적 활동을 통해 '공적 영역'에서 주체가 되는 경험을 한다. 친구로 인식하면서도 '사회생활'로 의미화되는 동료들과의 관계는 개인적인 친목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일터에서의 정보를 공유하고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도록 돕고, 노동 현장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한다." (<시간을 빼앗긴 여자들>, 163쪽)
생산성을 유지하기 위한 기업의 일방적인 노동 시간 단축은 대형마트 중년 여성 노동자들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앗아갔다. 실질 임금 하락과 노동 강도 강화는 물론이고, 일터를 매개로 한 사회적 네트워크를 무너뜨리고 일터 너머의 생활 시간마저 파편화시켜 버렸다.
노동자들의 일하는 시간을 줄이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절실하다. 그런데 노동 시간 단축이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제대로' 높이려면, '생산성'이 아닌 일터와 노동이 노동자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세심하게 살피는 것이 우선이다.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이미 너무도 열심히,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일하고 있다.
시간을 빼앗긴 여자들 - 상상되지도, 계산되지도 않는 여성의 일과 시간에 대하여
이소진 (지은이),
갈라파고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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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시간 단축 '만' 외쳐서는 안 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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