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다. 이에 전국의 가톨릭 사제와 신도들이 원주 원동성당에 모여 정부규탄과 지 주교 석방을 촉구하는 가두행진을 진행했다. "민주 헌정 회복하라" 구호가 적힌 현수막이 보인다.
지학순정의평화기금
경제제일주의에 항의하는 '제1시국선언'
우리는 인간의 위대한 존엄성과 소명을 믿는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하느님께서 창조하셨으며 하느님의 독생성자 예수그리스도로부터 구원받은 고귀한 존재다. 그러기에 인간은 이미 이 지상에서부터 자기의 이 존엄성을 존중받을 권리를 갖는다. 그러기에 또한 인간은 이 다음 완성될 천국에서 하느님과 더불어 완전하고도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로 부름받은 자기의 이 소명을 꽃피우고 열매 맺게 할 수 있는 여건을 개발하고 조성할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
인간은 이 자기실현이라는 위대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타고난 자질과 능력과 창의를 최대한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자유는 이 능력과 창의가 자라나고 피어오르고 열매 맺는 터전이요 토양이다. 자유는 능력개발과 창의발휘를 위한 필요불가결의 여백이다.
세계의 인간화, 보다 인간적인 세계건설은 인간이 그 소명에 응답하는 구체적인 행동이요, 실천적인 방법이다. 자유는 여기에 요구되는 절대적 전제다.
교회 공동체는 물론 국가 공동체를 포함하는 일체의 인간 공동체는 인간의 이 자유를 보장하고 그의 천부적 자질과 창의를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함으로써 개인으로서의 한계와 취약점을 보완해 주어야 한다.
민주제도는 정치 질서에 있어서 국가 공동체가 그 본연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정치제도임을 우리는 믿는다.
교회는 이와 같은 인간의 존엄성과 소명, 그의 생존권리, 기본권을 선포하고 일깨우고 수호할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 그러기에 교회는 이 기본권이 짓밟히고 침해당할 때면 언제 어디서나 피해자가 누구이든 그의 편에 서서 그를 대변하면서 유린당한 그의 권리를 회복해 주기 위하여 가해자와 침해자가 누구이든 그를 거슬러 항변하고 저항하고 투쟁할 권리와 의무를 갖는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국민 대중의 일상적인 인간 생존권과 기본권이 민주제도를 역행하는 정치적 권력행사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유린당하고 여지없이 암살되어가는 현실을 지켜보았고 그 고통을 뼈저리게 느껴왔고 그 굴욕을 씹어왔다.
소위 유신헌법은 1972년 10월 17일을 기하여 이 땅의 민주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였다. 한 사람의 집권자가 이른바 긴급명령이라는 형식적인 법 절차와 권력 남용으로 촌보도 양보할 수 없는 국민의 기본 인권과 존엄성을 짓밟고 있다. 이러한 권력 남용에 형식적인 합법성을 부여하는 소위 유신헌법은 일인 집권을 장기화시키고 삼권을 한 사람의 집권자에게 집중시키고 있다. 권력을 극한과 절대에 이르기까지 비대시키는 악법이 아니고 무엇이랴!
정부는 파렴치한 수단의 정보정치로 반공전선에 전념해야 할 정보기관을 동원하여 국민을 협박하고 그들의 개인생활을 침해하면서 오늘의 우리 사회에 공포 분위기와 불신풍조를 조장하고 있다.
또한 정부는 알아야 할 국민의 권리를 묵살하고 일체의 비판을 봉쇄하고 언론을 탄압함으로써 여론을 오도하고 있다. 침묵의 국민 대중을 천부당만부당하게도 집권자의 지지 세력으로 날조하는 월권과 위선과 파렴치를 자행하고 있다.
정책의 빈곤은 양식 있고 실력 있는 지식인들의 해외도피를 방조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미래 지향적인 정책적 비전의 부재 때문에 학생들을 비롯한 오늘의 젊은 세대에게 보람찬 내일에의 희망과 한국인으로서의 긍지를 심어주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젊은이들에게 실의를 강요한 것과 같아 퇴폐풍조를 부채질한 것이다.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80년대에 번영과 풍요를 구가하리라는 복지국가 건설을 표방한 정부의 경제제일주의, 이는 계수경제로 국민을 기만하고 현혹시키는 정부의 마술이다. 우리는 묻는다. 소수 악덕 기업가와 정상배들에게는 특혜를 베풀고 권력으로 비호하여 경영 외의 요인으로 치부와 축재를 일삼게 하면서도 이 나라의 가난한 서민대중을 외면하고 천대하는 정부의 의도는 무엇인가?
우리는 묻는다. 이 나라의 고질적인 부정부패를 뿌리째 뽑아 없애는 용단을 정부는 왜내리지 않는가? 우리는 묻는다. 고용증대와 외화획득이라는 미명하에 근로자의 신성한 기본권인 쟁의권을 박탈하면서까지 강행한 굴욕적인 외자유치와 합작투자는 오늘날 막대한 액수의 외채와 대일경제 예속화 이외에 무슨 소득을 거두었는가?
우리는 묻는다. 수백 년 묵은 농민대중의 수탈과 인고와 예종을 방치한 채 그들의 가난과무지와 후진성을 정부는 왜 외면하고 있는가? 우리는 묻는다. 소득의 불균형 분배에서 결과하는 격심한 빈부의 차가 과연 반공을 위한 국민총화와 국력배양의 정도요, 첩경인가? 우리는 묻는다. 우리의 이 암담한 현실이야말로 우리 자유우방 각국과의 선린과 호혜 평등을 원칙으로 하는 외교관계를 악화시키고 국제간에 대한민국의 국위를 손상하고 대공 외교정책에 심각한 차질을 자초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것이 우리의 현실일진대 어찌 강요된 침묵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있겠는가? 그러기에 성직자, 교수, 학생, 변호사, 문인, 근로자 및 그 밖의 민주 애국인사들과 시민들은 마침내 침묵을 깨뜨리고 민주헌정의 회복과 사회정의를 절규하는 것이다. 국민의 정당한 의사를 정당한 방법으로 표시하면서 정부 당국의 맹성과 각성을 촉구하려 나선 것이다. 이들을 체포하고 구금하고 극형과 중형에 처한 처사는 납득할 수 없는 인권유린이며 국민의 기본권을 무시하는 횡포다. 국가와 정부는 엄연히 서로 구별되어야 한다. 그러기에 정부는 국민으로 하여금 그가 원하는 국민 위주의 정부를 선택할 수 있는 기본권리를 존중하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정당하고도 합법적인 절차로 이 권리를 행사하여 정권의 평화적 교체를 가능케 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5ㆍ16 군사혁명으로 얼룩진 후진국의 정치적 낙후성이라는 오명을 씻고 반만년에 이르는 유구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문화민족으로서의 우리 한민족의 정체를 다시 한 번 세계만방에 과시하는 것이다. 빈곤을 타파하고 사회정의를 구현하며 진정한 민주 복지국가로서 대공투쟁에 자신과 긍지를 가지고 우방열국들과 대열을 함께 하면서 인류의 문화발전과 세계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확신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우리의 소신과 주장을 그동안 전국 각지에서 열린 기도회를 통해 누차 표명하고 선포해 왔다. 그러나 정부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에 대한 성의 있는 답변으로서의 정책전환을 실증해 주지 않고 있다. 이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우리의 결의를 다시 한 번 다짐하면서 정부의 각성과 성의 있는 답변을 촉구하고 국민 여러분의 여망을 반영시키기 위하여 정당하고도 합법적인 의사표시의 방법으로서 평화적 시위에 나서기로 선언한다.
우리의 결의
1. 유신헌법을 철폐하고 민주헌정을 회복하라.
2. 긴급조치를 전면적으로 무효화시키고 구속 중인 지학순 주교를 비롯하여 성직자, 교수, 학생, 민주 애국인사를 즉각 석방하라.
3. 국민 생존권과 기본권을 존중하고 언론, 보도, 집회,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라.
4. 서민 대중의 최소한의 생활과 복지를 보장하는 경제 정책을 확립하라.
주석
5> 함세웅, 앞의 책, 1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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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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