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적금도에서 바라본 팔영대교 모습으로 팔영대교를 건너면 고흥이 나온다.
오문수
빈번한 왜구의 침입으로 인해 고려 후기에는 섬을 비워두는 공도정책을 실시했고 왜구의 상륙처였던 포두, 도화, 풍안 등지에 백치성, 독치성, 백석리장성 등을 쌓고 인근 백성들이 식량을 비축해 번갈아 가며 수비했다.
왜구들의 약탈에 골머리를 썩히던 조선 조정에서는 연해 지역을 중심으로 진과 성곽을 축성하고 봉수대를 만들어 통신망을 정비하는 한편 말을 기르는 목장, 염전, 봉산, 어장 등 경제적 통치시설도 만들었다. 전라좌수영은 성종 10년(1479년)에 여수에 위치한 내례포에 설치됐다. 전라좌수영의 다른 수군진들도 성종 16년(1485년)부터 성종 21년(1490년)사이에 완공됐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 고흥수군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영 휘하에는 5관(순천, 광양, 낙안, 흥양, 보성)과 5포(사도, 방답, 여도, 녹도, 발포)가 있었다. 전라좌수영에 속한 흥양현과 여도, 사도, 발포, 녹도 수군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수군이 승리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쟁에 참전하자고 주장한 이들은 녹도만호 정운과 군관 송희립이었다. 다음은 이순신이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5월 3일 <난중일기>에 쓴 내용으로 녹도만호 정운이 한 말이다.
"전라우수군은 기다려도 오지 않는데 적세는 이미 서울까지 박두하였으니 더없이 통분함을 이길 수 없다. 만일(해전에서도 제해권 장악의) 기회를 잃게 되면 뒷날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녹도 군관 송희립 역시 "영남은 우리 땅이 아니란 말인가? 적을 치는데 이 지역 저 지역 차이가 없으니 먼저 적의 선봉을 꺾어 놓게 되면 본도 또한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고 주장하자 전라좌수영 수군이 곧바로 영남 해역으로 출전했다.
임진왜란 당시 맹활약했던 고흥 출신 전투 지휘관들에 대한 기록은 1662년에 쓴 <흥양읍지>에 나와있다. 송건, 최천보, 정걸, 송대립, 신여량, 송덕일, 송희립, 진무성, 송심, 송무상 등 확인된 인물로 총 195인이었다. 일반 향민들은 해상의병과 송대립장군 휘하의 육상의병으로 참여해 구국의 길에 나섰다.
반면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던 일반 민중들은 전선 건조, 둔전 개간, 군기 마련 등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면서 고흥은 남해안 수군의 후방기지 역할을 했다.
여수에서 승용차를 타고 고흥으로 여행했던 분들은 여수와 고흥이 멀리 떨어진 지역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해서 다음 지도를 이용해 좌수영성에서 고흥 4포까지의 거리를 직선거리로 측량해 보았더니 여도진 25.3㎞, 사도진 32.5㎞, 발포진 46㎞, 녹도진 60.2㎞로 지근거리다.
4포중 전라좌수영과 가장 가까운 여도진
고흥에 위치한 1관 4포를 보기 위해 아침 일찍 고흥을 향해 출발했다. 필자를 안내할 분은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이자 고흥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인 송호철씨다. 여수에서 가장 가까운 여도진으로 가려면 여수에서 고흥까지 연결된 연륙교를 이용하면 된다. 10여년 전 방문한 적이 있지만 내비게이션을 보고 운전해도 쉽지 않아 몇 번이나 전화해서야 송호철씨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