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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끼 밥의 평등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에게 보내는 성소수자의 편지] 곡기를 끊는 그 마음의 절박함

등록 2022.05.02 11:13수정 2022.05.02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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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발의 후 15년이 지난 오늘날, 여전히 차별금지법은 제정되지 않았다. 그 사이 차별과 혐오선동을 이용하거나 방치해 온 정치는 한국사회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의 국회 앞 평등텐트촌 농성과 미류(인권운동사랑방), 종걸(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두 인권활동가의 단식에도 불구하고, 더불어민주당은 차별금지법을 당론으로 채택하지 않고, 여러 핑계를 앞세워 평등을 미루고 있다.

차별금지법 있는 봄을 맞이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세력의 폭언을 제일 앞에서 맞아야만 하는 성소수자들이 더불어민주당의 책임과 역할을 요구하기 위해 4월 21일부터 5월 3일까지 매일 한 명씩 공개적으로 편지를 적어 보낸다.[기자말]
 김비, 2020년 엄마 복희씨와
김비, 2020년 엄마 복희씨와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곡기를 끊는 그 마음의 절박함을 알고 계신가요? 49년생 여성인 제 생모 복희씨는 아직도 자신이 곡기를 끊고, 살던 방에 불을 질러 죽으려고 했던 때를 되짚고는 몸을 부들부들 떱니다. 지켜줄 부모도 없고 이웃이나 친구도 빼앗긴 채, 가난한 가계의 종처럼 살다가 팔려가듯 시집을 가 가부장의 폭력에 시달렸던 그 한 인간은, 생때같은 자식 셋을 두고 도망칠만큼 절박했지요. 

자식까지 버리고 도망쳐 나왔어도 어디에도 기댈 곳 없던 그 생은, 육시랄 왜 내 팔자만 이러나 싶은 그 억울함은, 끝내 곡기를 끊고 죽자 다짐했습니다. 제 살던 방에 불을 질러 놓고도 구사일생 끌려 나오며 땅을 치고 울었던 건 여기에 희망이 없음을 알아버렸기 때문이겠지요. 저 세상이 어떤 꼴이건 여기 이 세상보다야 지독할까 그런 마음이 이 생을 포기하게 했겠지요. 

49년생 여성 복희씨 뿐만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이름도 없이 죽어간 무수히 많은 성소수자들이 그러했을 것이고, 불과 작년에 한꺼번에 죽은 세 명의 트랜스젠더들이 그러했을 것이고, 1995년 자신의 노점 철거에 항의하다가 분신한 장애인 최정환이 그러했을 것이고, 2001년 일도 못하게 하면서 28만 원 기초생계비로 어떻게 살라는 거냐고 제 목숨을 끊어 대통령에게 그 간절함을 전하려했던 발달장애인 여성 최옥란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실패'한 삶에 관해선 짐작할 수 있겠지요? 온 힘을 다 해 애썼지만,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 쳤지만 끝내 실패하고만 그 무력감이 어떤 건지 지금이라면 다들 조금이나마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마도 어쩌려고 다들 이러나 싶은 그런 불안과 두려움일 겁니다. 저 조차도 요즘은 정치 뉴스를 보지 못합니다. 아무리 제일 나중으로 밀려난 무가치한 생이더라도, 그래도 국민의 책임은 놓치고 싶지 않아 꼼꼼히 정치인들의 발화를 들었습니다. 그들의 표정을 읽고, 때로는 탄성을 지르고, 때로는 탄식하던 그 시간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설마 일만 명도 되지 않는 트랜스젠더 나부랭이이니 일만 명의 안위만을 꿈 꿀거라 생각하진 않으시겠지요? 제 아비는 나라 위해 목숨 바쳐 싸우다가 평생 고통 속에 희생된 군인이었고, 제 어미는 가부장의 폭력에 희생해야했던 삶이면서도 아이를 셋이나 낳고 키우려 했던 순종적이고 복종할 줄밖에 몰랐던 평범한 여성이었습니다. 저는 한 사람의 성소수자이지만, 이 나라에 제 아비와 같은 국민이 희생을 치를 일이 다시 없기를 바라고, 제 어미처럼 순하고 재능 있던 한 여성이 가난과 불평등으로 인해 기회조차 제대로 얻지 못한 채 그 삶을 망쳐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맞습니다. 제 아비와 어미는 정치를 몰랐을 테고, 저 역시 정치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더 정치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습니다. 그러한 제 태도와 감각을 뭐라고 이름 붙이든 간에, 저는 '정치'라는 분야에서 저보다 훨씬 더 많은 고민과, 노력과, 성실함과, 인내를 쌓은 누군가는, 분명히 저보다 나은 판단을 할 거란 믿음이 있었습니다. 

'배운 사람'이라고 쉽게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건 분명 '못 배운 사람'이란 말처럼 얄팍한 것 일테니까요. 그래도 저보다 더 오래도록 성실했고, 노력했고, 언제든 국민을 위해야 하는 정치인이니, 그만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편에 서서 고민과 고민을 거듭했을 테니, 제가 모르는 현명함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저는 아직도 믿고 있습니다. 
 
 2019년 양산 이웃분들과 함께
2019년 양산 이웃분들과 함께차별금지법제정연대
 
그래서 당시 지지해 마지않던 유력 대선 주자께서 성소수자의 존재를 두고 '반대한다'고 했을 때, 커다란 TV 화면 앞에 잠시 얼어붙었던 때가 아직도 생생합니다. '반대'라니, 여기 숨 쉬며 살아있고 게다가 당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두고 '반대'라니, 숨이 턱턱 막혔습니다. 저렇게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아낌없는 존경을 받아온 믿음직한 사람에게까지도 우리들의 삶과 존재는 그토록 쉽게 '반대'일 수 있구나. 아무리 많이 배우고, 성실하고, 노력한 현명한 사람에게도, 우리들의 존재는 간단히 부정당할 수 있구나. 그 참혹하게 무너진 마음이 아직도 잘 추슬러지지 않습니다.  

그때처럼 뿌리 깊은 혐오의 발화는 현재에도 너무도 쉽게 목격됩니다. 성소수자 관련 기사, 장애인 관련 기사 밑에 달린 '글자들'을 보면 여기가 같은 미래를 꿈꾸는 공동체가 맞나, 내 아버지가 목숨을 바쳐 지켰던 그 나라가 맞나 아뜩해 집니다. '그래 극소수만의 생각일 거야.'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인 타인의 삶을 앞에 두고 이 참혹한 문장들이 진심일 리 없다고 믿으려 하지만, 또 다른 이름의 정치인들은 아직도 당당하게 우리의 존재를 두고 '반대한다'고 말합니다. 소위 보수 진영들 속에도 성소수자가 있고 장애인이 있고 그 가족이나 지인들이 있을 텐데, 오천만 국민을 얼마나 자의적이고 단편적으로 인식하면 부끄러운 줄 모르고 그런 발화를 거듭하실까, 이 나라 국민의 한 사람으로 저는 아연 실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꿈꾸는 미래라는 건, '깨끗한' 유전자를 지닌 '깨끗한' 몸들끼리 결합해 '깨끗한' 인간만을 생산해 '깨끗한' 나라를 만드는 걸까요? 미안하지만, 인간 종족의 탄생도 결국 변이의 결과였다는 걸 이젠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미래는 결국 다양성일 뿐, 그 다양성 앞에 얼마나 빨리 현명한 태도를 지닌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느냐의 문제일 뿐이지요. '그런 사람들'의 문제로만 누군가의 삶을 타자화하는 순간, 그들의 미래는 더욱 '깨끗하게' 종말에 가까울 겁니다.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석학들과 예술가들이 예견해 왔던 것처럼 말이지요.  

당장 내 앞에 해로울 게 없다고 혐오를 방조하거나 조장하는 태도는, 최소한 정치인의 태도일 리 없습니다. 정치인은 결국 계산에 밝을 수밖에 없단 현실은 안타깝지만, 국민을 위한 계산이어야 합니다. 정치인이 권력을 지향하는 사람인 건 맞겠지만, 국민을 위한 권력일 때에만 맞습니다. 정치인이 꼭 권위를 지녀야하는지 모르지만, 국민들을 하나하나 헤아려 반대하는 국민들에게 조차 존경 받을 때 그 권위가 제대로 지켜지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지금 당장엔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다고 그 혐오를 방조하고 조장하는 태도는, 미래 어느 순간 이유도 알 수 없는 불안과 혼란으로 우리 사회에 들이닥칠 겁니다. 기본적인 인간의 권리와 가치가 존중 받지 못할 때, 누구라도 침해받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반성도 모르고 뉘우침도 없이, 당장에 제 앞길을 막았다고 그 사람을 짓밟고 가는 태도가 언제든 정당화될 테니 말이지요. 평등해야할 모든 인간의 권리와 가치가 훼손된 사회라면, 평등은 자의적인 폭력의 언어가 될 것입니다. 갖가지 식생으로 푸르고 또 푸르러야 마땅한 미래의 숲을 모조리 태워버릴 수 있는 그 불씨 하나를, 우리는 지금 용인하고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원인도 가늠할 길 없이 엄청난 재난의 이름으로 우리 앞에 도래할 미래를 말이지요.

아직 늦지 않았을 겁니다. 늦었다고 생각하는 때가 제일 이른 때라는 말은, 시기를 말하려는 문장이 아니라 '의지'를 촉구하는 문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린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저는 1971년생, 경상남도 양산에 사는 오십 대 초반 중년의 트랜스젠더 글쟁이입니다. 한 달 이백만 원 벌이를 목표로 삼지만 올해에도 쉽지 않을 것 같은, 세끼 밥의 평등을 고민하는 한 사람의 국민입니다. 제 밥 세끼는 어떻게든 제가 알아서 해볼 테니, 의원님들께서 거기 국회 앞에 곡기를 끊은 두 사람의 세 끼 밥을 챙겨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2022. 5. 2.
김비 드림
 
 2019년 양양산타워 앞에서 신랑과 밤마실
2019년 양양산타워 앞에서 신랑과 밤마실차별금지법제정연대
덧붙이는 글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며 성소수자들이 공개 편지를 보냅니다.
#차별금지법 #평등법 #성소수자
댓글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차별의 예방과 시정에 관한 내용을 담은 법입니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다양한 단체들이 모여 행동하는 연대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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