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시건강가정지원센터 사업성과보고회.
최미향
- 성남보육원에 근무하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들이 있다면 들려달라.
"아이들과의 생활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따뜻해지며 입가에 웃음이 고인다. 그리고 가슴이 먹먹해진다.
어느날 밤 새벽에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여기 파출소입니다.' 아동학대로 신고가 들어왔다고 파출소로 나오라고 했다. 연락을 받고 가보니 보육원 아동이 쓰레기봉투를 입고 때국물이 줄줄 흐르며 눈물범벅이 되어 앉아 있었다.
'OO아 어떻게 된 거야' 물으니 아이는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경찰분이 말씀하시길 학교 운동장에서 늦은 밤에 운동을 하고 있는 학생이 쓰레기봉투를 입고 구령을 외치며 운동장을 뛰는 모습을 보고 신고를 했단다. 그날은 무척 더운 8월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감독 선생님에게 어떻게 아이를 이렇게 할 수 있느냐 물으니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와 샤워를 시키고 감자탕 한 그릇을 사 먹이고 난 후 보육원으로 귀원하였다. 부모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보육원에서 생활하는 것이 아이들 잘못이 아닌데 편견과 차별 속에서 상처가 가득한 우리 아이들의 마음을 누가 감히 알겠는가?
지금도 아동생활시설에서의 수없이 많은 사연과 상처 입은 아이들을 위해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과 그리움이 속내로 남아있다. 지식이 부족하니 아이들의 인권을 지켜주지 못하고 대변해 주지 못해 난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정신보건분야의 인권 강사가 되었다. 그리고 방송통신대학교에서 법학과에 편입하여 4학년에 잠시 내려놨다. 아이들은 나를 성장시킨 멘토이기도 하다.
정서발달장애아동, 느린학습자(경계선 아동)를 '학교의 학급 평균을 내리는 대상'으로 만드는 학부모님들이 순수한 동심을 갈라놓았다. 그 반면에 편견 속에서도 아이들을 인정해 주고 잠재된 능력을 알아봐 주는 우리 후원자님들의 관심과 사랑이 있었다. 밝게 성장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당당한 지역사회구성원으로 자기 몫을 잘하고 있는 우리 아이들에게 고맙고, 감사하고, 대견하다.
두 번째 이직을 했다. 당진시건강가정지원센터장으로 건강한 가정을 만들기 위한 사업을 중점적으로 하면서 보육원 아이들을 더 많이 생각했다. 건강한 부모님과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했더라면, 사랑이 많은 부모님이 계셨으면 어땠을까."
- 이직을 하고 다시 학업을 선택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나는 26세에 보건 공무원으로 재직을 하고 있을 때 지인의 소개로 사업하는 동갑내기 남편을 만나 3개월 만에 약혼식과 결혼식을 올렸다. 눈에 서로가 콩깍지가 씌었었다. 결혼 후 바로 허니문 베이비가 생기고 남편을 도와 함께 사업을 하기 위해 직장을 퇴사했다.
사업장에서 남편과 있으니 의견 충돌로 인한 말싸움이 많았다. 출산하고 아이까지 돌보는 것은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즈음 나는 생각했다. 다시 공부를 해야겠다고, 그래야 다시 사회인으로 취업을 할 수 있겠다 생각하고 EBS 교재를 구입하여 공부를 시작했다.
31살 수능 당일, 해가 떠오르기 전에 수능을 보기 위해 서산여고로 향했다. 고3들과 함께 수능을 보게 되었다. 교실을 찾아내 자리를 찾으니 맨 앞자리였다. 가슴이 터질 정도로 요동을 쳐댔다. 긴장된 마음으로 차분하게 수능을 치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책을 읽고 신문을 열심히 탐독한 것이 언어영역에 도움이 됐다. EBS 교재로 공부한 것이 적중했다. 나는 그렇게 대학의 문턱을 넘어 입학을 했다.
사람은 무조건 배워야 한다는 친정아버지의 가르침이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던 것 같다. 우리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하며 대학 생활을 시작했는데, 우리 아이 초등학교 졸업과 함께 나도 대학원(사회복지 전공)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열심히 했던 결과였다. 대학 공부를 하면서 남편과의 갈등은 더 깊어갔다. 물론 학비 지원을 못 받았다. "네가 선택한 공부니 네가 알아서 하라"는 말 한마디뿐, 그래도 반대 안 하는 것만도 고마웠다. 친정에서 도와주고 방학에는 둘째 언니에게 아이를 맡기고 나는 학비를 벌기 위해 타 지역으로 갔다.
셋째 언니 집에 얹혀살며 핸드폰 만드는 중소기업에서 아르바이트, 기사식당 설거지 등 다양한 곳에서 열심히 학비를 벌었다. 학자금 대출도 받으며 학업을 이어나갔다. 그래야 '남편으로부터 경제적 독립을 할 수 있다'라는 다짐으로. 나의 인생 터닝포인트를 만들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