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할아버지, 김형배의 유일한 사진. 할아버지에 대한 나의 기억은 이 사진 한 장이 전부다.
김경준
쉽지는 않았다. 1차적으로 아직 생존해 계시는 할머니께 할아버지의 6.25 참전 사실에 대해 여쭤봤으나, 전쟁 뒤 너무나 오랜 세월이 흘러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계셨을 뿐더러 관련 기록도 전혀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막막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병무청의 문을 두드렸다. 병무청에서는 할아버지의 군번을 알아야 참전사실 조회가 가능하니 인근 주민센터에 가서 군번이 기록된 '구원장(개인별 주민등록표)'이라는 걸 발급 받으라고 안내해줬다.
그래서 인근 주민센터를 찾아 구원장 발급을 요청했으나 곧바로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할아버지의 구원장이 조회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담당 직원은 어떻게 해서든지 할아버지의 기록을 찾아주기 위해 1시간 넘게 전화기와 컴퓨터를 붙들고 고군분투했으나, 없는 기록을 만들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쉬운 대로 우선 '제적등본'을 발급받았다. 처음 보는 할아버지에 대한 기록이었다. 제적등본을 통해 증조할아버지의 성함이 '김범(金範)'이란 것과 할아버지의 생년월일(주민등록번호상)이 '1930년 2월 1일'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제적등본을 가지고 이번엔 국방부에 민원을 넣었다. 민원을 이첩 받은 육군본부 담당자는 "전쟁 당시에는 주민등록번호가 없었기 때문에, 군번을 모르면 확인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절망적인 순간이었다. 그러나 수화기 너머로 이어지는 담당자의 답변에 한 가닥 희망이 생겼다.
"할아버님과 비슷한 행적을 보이는 인물이 있는데, 증조할아버님의 성함이 일치하지 않아서 동일인물이라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할머님께 증조할아버님의 성함과 할아버님의 입대 당시 거주지 등을 다시 확인해보세요."
마침 얼마 뒤에 증조할아버지의 제사가 있었다. 제사를 위해 온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할머니를 인터뷰했다. 그 결과 증조할아버지의 다른 이름(異名)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확인한 제적등본상의 증조할아버지 성함은 분명 김범이었는데, 할머니는 '김흥수'라는 이름으로 기억하고 계셨던 것이다. 또 할아버지가 입대할 당시의 거주지가 '전라남도 강진군 칠량면 명주리'라는 것도 확인했다.
날이 밝자마자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다시 육본 담당 직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 얘기를 들은 직원은 잠시의 침묵 뒤 말했다.
"아, 이 분이 맞네요. 김흥수의 자(子), 김형배. 입대 당시 거주지도 맞습니다. 할아버님께서 6.25 전쟁에 참전하신 걸로 확인됩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맞다는 담당 직원의 답변에, 순간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의 감정은 뭐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드디어 할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이를 토대로 병무청으로부터 할아버지의 '병적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국가보훈처에 병적증명서와 함께 6.25 참전유공자 등록신청서를 제출한 지 꼭 한 달만에 대통령 명의의 국가유공자 증서와 함께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긴 공문이 집으로 날아온 것이다.
"국가와 국민의 안위와 자유수호를 위해 헌신하신 고인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귀하께서 국가(참전)유공자로 신청하신 故 김형배 님에 대해 관련 규정 및 제출서류 등을 검토한 결과, '참전유공자 예우 및 단체설립에 관한 법률' 제3조(참전유공자) 적용대상자로 결정하였음을 안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