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스 존슨 정권의 몰락
결국 오래 가지 못했다. 영국 보리스 존슨 총리에 대한 보수당 내 불신임 투표가 이루어지고 한달, 보리스 존슨 총리는 결국 총리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코로나19로 인한 봉쇄 시기 거리두기 수칙을 무시하고 파티를 즐겼다는 '파티게이트(Partygate)'에서 시작된 일련의 정치적 격동은 이렇게 한 정권으로 몰락으로 끝을 맺었다.
영국 보수당은 이제 차기 당대표를 선출하기 위한 경선에 나섰다. 보수당이 하원 다수당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이 경선에서 당대표에 당선되면 곧 영국의 총리직에 오르게 된다. 보수당 하원의원의 투표로 이루어지는 이번 경선에는 총 8명의 후보가 출마했다.
지난 13일 치러진 1차 투표에서는 커트라인인 30표를 받지 못한 후보 2명이 탈락했다. 1차 투표에서 가장 많은 표를 받은 후보는 88표를 얻은 리시 수낙 전 재무장관이었다. 이어서 페니 모돈트 국제통상부 부장관이 67표를 얻었다. 리즈 트러스 외무장관은 50표로 3위를 기록했다. 4위는 40표를 얻은 케미 바데노크 전 평등담당 부장관이 차지했다.
5위로는 톰 투겐드하트 하원 외교위원장이 37표를 얻었고, 6위에는 32표를 얻은 수엘라 브레이버만 법무장관이 올랐다. 나딤 자하위 재무장관과 제러미 헌트 전 외무장관은 각각 25표와 18표로 커트라인인 30표를 확보하지 못해 이번 투표에서 탈락했다.
이후 2차 투표부터는 별도의 커트라인 없이, 최하위 득표자를 탈락시키는 방식으로 투표가 진행된다. 이어지는 투표마다 매번 최하위자가 탈락해 후보가 2명만 남게 되면, 보수당 당원투표를 실시해 둘 가운데 최종 승자를 결정한다. 여기서 승리한 후보는 보수당의 당대표가 되고, 곧 영국의 총리가 된다.
다양성의 경선
이번 경선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독특했다. 8명의 후보가 출마했는데, 이 가운데 절반인 4명이 여성이었다. 출신지와 인종적 배경도 다양했다. 전체 후보 중 영국계 백인 남성은 톰 투겐드하트 위원장과 제러미 헌트 전 장관뿐이었으며, 그마저도 헌트 전 장관은 최하위 득표로 탈락했다.
1차 투표에서 1위를 기록하며 가장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로 꼽히고 있는 리시 수낙부터가 그렇다. 옥스퍼드를 졸업한 42세의 리시 수낙은 이달 초 재무장관직을 사임하며 보리스 존슨 정권의 몰락을 예고한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리시 수낙 전 장관의 부모는 인도계로, 동아프리카에서 거주하다가 영국으로 이주했다. 리시 수낙은 하원의원 취임 당시 기독교 성경 대신 힌두교 경전인 '바그와드 기타(Bhagwad Gita)'를 들고 취임선서를 한 힌두교도이기도 하다.
2위와 3위를 차지한 페니 모돈트 부장관과 리즈 트러스 장관은 영국계 백인이지만 모두 여성이다. 4위의 케미 바데노크 전 부장관은 부모가 나이지리아인으로 아프리카계 영국인이다. 6위의 수엘라 브레이버만은 리시 수낙과 마찬가지로 부모가 동아프리카에서 이주한 인도계다. 브레이버만 장관 역시 기독교도가 아닌 불교도로, 성경 대신 법구경을 들고 하원의원 취임 선서를 했다. 1차 투표에서 탈락했지만 나딤 자하위 재무장관은 바그다드 태생의 쿠르드인으로, 11살의 나이에 영국으로 온 이민자다.
이번 경선에서 영국 역사상 최초의 유색인종 총리가 탄생한다면, 그것은 분명한 진보다. 설령 후보의 절반을 차지하는 유색인종 후보가 당선되지 않더라도, 영국 보수당이 이렇게 다양한 후보군을 두고 경선을 치렀다는 사실 자체가 한 시대의 진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수당이기에 보여줄 수 있는 유연성이다. 유색인종을 비롯해 소수자 집단을 위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온 진보진영에서는 오히려 주저되는 일이다. 어쨌든 과반의 지지를 얻어야 하는 양당제 대중정치 속 노동당에게는 손쉽게 시도하지 못할 일이다.
영국 역사상 둘 뿐인 여성 총리인 마거릿 대처와 테레사 메이는 모두 보수당 소속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유일한 비영국계 총리로 볼 수 있는 유대계 벤저민 디즈레일리 역시 보수당 소속이었다. 이것은 꼭 영국만의 현상도 아니다.
그러나 어느 정당이든, 어느 정파든 국가와 행정조직의 수반으로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등장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다양한 인종과 성별의 후보자가 선거에 나와준다는 것만으로도 사회적 소수자 집단에는 힘이 될 수 있다.
다양한 집단의 구성원이 의원이 되고, 장관이 되고, 총리가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성과다. 직책에 걸맞은 능력은 이 다양성과는 별개로 평가될 일이다. 이들이 의원으로서, 장관으로서, 총리로서 유능했는지, 또 자신이 속한 소수자 집단의 불평등을 충분히 개선했는지는 별개의 일이다. 다양성은 그 자체만으로 높게 평가할 수 있다. 보수당의 이번 총리 경선은 그런 점에서 높이 평가해야 한다.
이념적 다양성의 과제
그러나 보수당이 인종과 성별의 다양성을 확보한 만큼, 이념의 다양성이 충분히 마련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총리 당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리시 수낙 전 장관은 당선된다면 경제를 "대처와 같이 운영할 것"이라고 분명히 언급했다. 이제까지 그가 재무장관으로서 펴온 경제정책을 본다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다른 후보라고 다르지 않다. 작은 정부와 감세, 자유시장주의와 유럽회의주의를 보수당 후보 전원이 앞세우고 있다. 브레이버만 장관 역시 대처 전 총리를 "나의 영웅"이라고 칭송했다. 이번 경선을 두고 "대처리즘 아류의 상호 경쟁"이라는 조롱이 나오는 이유다.
영국 보수통합당은 하나의 정당이고, 하나의 정당이 하나의 가치 아래에 집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그러나 하나의 가치 아래에서도 다양한 이념과 정책이 모일 수 있고, 이 가운데 합리적인 노선을 합의 하에 선택하는 것이 시대에 따라 정당이 발전하는 방식이다. 당원이 추구하는 가치는 같아야 하지만, 이념과 정책은 다를 수 있다. 그 가운데 도태된 것을 잘라내고, 발전된 것을 채택하는 것이 정당의 발전 방향성을 규정한다.
영국 보수당에는 인종과 성별의 다양성은 있지만 이념과 정책의 다양성은 없다. 서로 다른 공동체적 배경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같은 정책을 말한다. 여기서는 잘라낼 것도 채택할 것도 없다. 상징은 있지만 변화는 없다. 앞으로 보수당의 나아갈 길을 말해야 하는 경선에서, 사실 어떤 노선도 충돌하지 않고 있다. 변화의 에너지가 이 정당에는 없다.
다시 말하지만 다양한 배경의 후보자가 여러 직위를 맡고, 경선에 출마하는 것은 그 자체로 좋은 일이다. 수많은 소수자 계층에 줄 수 있는 메시지가 있다. 그러나 그렇게 다양해진 사람만큼이나 보수당의 이념적 외연도 확장되어야 한다. 당의 수장을 선출하는 선거는, 그 외연이 어디까지 확장되어야 하고 어디까지를 도태시켜야 하는지를 놓고 벌어지는 논쟁이어야 한다. 그것은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는 정파의 발전 법칙이다.
다양성은 인종과 성별에 관계없이 모든 합리적 의견을 받아들이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번 경선에서 그 의견은 다양하지 않다.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보수당 지도부와 정권 인사들은 다양해졌지만, 기층의 다양성은 전혀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수당 당원 중 95%가 영국계 백인이다. 당원 63%가 남성이며, 58%가 50세 이상이다. 80%가 중산층 이상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다. 노동당 의원의 50%가 여성이고 20%가 소수인종이지만, 보수당 의원 중에서는 24%만이 여성이고 소수인종 비율도 6%에 불과하다. 다양한 후보를 가진, 전혀 다양하지 않은 정당이다. 이렇게 경직된 당원집단에 호소해 표를 얻어야 하는 후보자들이 다양한 목소리를 낼 수는 없다.
앞에 나선 후보자들은 다양했지만, 그 기층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말했듯 후보자의 다양성은 그 자체로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이념과 정책의 다양성으로 확장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보수당의 미래를 위한 다양성의 역할이다.
이번 총리 경선에서는 영국 최초의 유색인종 총리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렇게 나온 유색인종 총리가 정작 수십년 전의 신자유주의를 반복하고, 소수자 집단의 권리를 무시하고, 자국우월주의의 원칙 아래 유럽과의 관계를 도외시한다면 다양성의 의미는 제한될 것이다.
이념과 정책의 다양성은 정치의 미래를 여는 에너지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할지에 대한 격렬한 논쟁과 충돌, 그 끝의 합리적 선택을 추동하는 원동력이다. 여성과 유색인종 후보가 대거 출마한 이번 총리 경선에서 우리는 그 에너지를 볼 수 있을까. 볼 수 없다면, 보수당의 미래는 어느 백인 엘리트 남성이 이끌었던 보수당 정권의 현재와 썩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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