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9월 7일 귀환한 선박에 대한 조사를 위해 합동신문조를 구성. 총 책임지휘는 중앙정보부가 맡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변상철
고통스러운 구타를 더는 견디지 못한 김씨는 수사관에게 악을 쓰면서 덤볐다고 한다. '북한에 끌려가서 개고생하고 돌아왔는데 내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렇게 때리느냐'며 덤벼들자, 수사관들은 김씨를 다른 방으로 데리고 갔다고 한다. 조사받는 방보다 조금 넓었던 그 방에는 중앙정보부 수사관이 앉아 있었다.
중앙정보부 수사관은 김씨에게 당시 새로 나온 담배라며 '은하수'라는 담배를 권했다고 한다. 김씨는 건넨 담배 한 개비를 다 피우고서는 '상갓집 개만큼도 취급을 해주지 않는 게 말이 되냐, 내가 고향이라고 왔는데 이렇게 취급을 하느냐'며 항의했다. 그러자 그날 이후로 고문이 멈췄다고.
그렇게 일주일 정도 조사를 받고 나서 김씨는 양양의 물치비행장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서울에 있는 미군 부대로 이동했다. 미군 구치소에 있으면서 조사를 받았는데, 조사받을 때는 미군 수사관 1명, 보안대 조사관 한 명, 통역 등 3명이 조사했다고 전했다. 조사받았던 건물은 퀀셋(길쭉한 반원형의 간이 건물) 모양의 양철 건물이었고, 조사내용은 속초에서 받았던 내용과 동일했다. 문제는 중앙정보부에서의 조사였다.
"하루는 이문동에 있는 중앙정보부 지하실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어요. 미군 부대에서는 구타를 당하지 않았는데 이문동에서 조사받을 때는 구타를 하더라고요. 구둣발로 차고. 속으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거예요. 고국이라고 찾아와서 이래도 밟히고 저래도 밟히고 이러니까요."
미군 부대 조사가 끝난 뒤 고성경찰서로 돌아와 유치장에 감금되었다. 비좁은 유치장에서 생활하는 동안 유신(1972년 10월 17일)이 선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유신 선포 직후 구속이 되었고, 그 뒤로 검찰 조사와 법원 재판에서 집행유예 선고를 받고 풀려났다.
김씨는 반공법, 국가보안법, 수산업법 위반으로 처벌됐다. 김씨는 북에 납북될 당시 어느 지점에서 납북되었는지, 군사분계선을 월선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음에도 법 위반으로 처벌받은 게 억울하다고 항변했다.
"난 경찰이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경찰 시험을 보러 경기도 어디로 서류를 꾸며서 갔는데 이북 갔다 온 사람은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당시 남산터널 공사를 하던 서울의 대한공업사라는 회사에 취업하러 갔어요. 취업 이야기가 다 됐다고 해서 갔는데 공사 책임자가 날 부르더니 이북에 갔다 온 사람은 일할 수 없다며 안된다는 거예요.
그 뒤에 목동에 있는 모자공장에도 취업해 봤지만 금방 쫓겨났어요. 심지어 사방공사(토양 침식을 방지하기 위하여 식물 피복이나 콘크리트 구조물을 설치하는 공사)에도 서무계 직원으로 일하려고 해도 안 되더라고요. 그렇게 모든 생활을 감시당하고 살아야 했다니까요.
나만 그래요? 자식들도 취업이 안 되는 거야. 아들도 그렇고 딸도 그렇고 취업이 안되는 거야. 결국 아들은 조리사 시험을 봐서 자영업 식당을 해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어디 서류를 넣어도 받아주지를 않아요."
김씨는 자신만이 아니라 자식들의 피해가 더 마음 아프다고 했다. 자신도 피해자이지만 가족이라는 이유로 연좌제 피해를 보는 것이 지금의 대한민국 현실이라며 김씨는 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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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위해 이름까지 바꾸었으나... 이젠 자식들도 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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