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9월 14일 조선일보한남 나루터가 폐쇄되어 서빙고 나루터로 성묘객들이 몰려 혼잡했다는 기사.
조선일보
한남대교는 계획에도 없던 시절이었으니 강북에서 육로를 통해 강남으로 가려면 한강대교를 이용해야 했다. 다리를 건너도 광주군 언주면의 공동묘지는 흑석동과 동작동을 거쳐 멀리 돌아가야 하는 곳에 있었다. 그러니 도심에서 가까운 한남동이나 서빙고에서 배를 타고 잠원동으로 건너가서 말죽거리 방향으로 향하는 것이 훨씬 가깝고 편했을 것이다.
한편, 위 기사는 과거 개포동 일대에 서울시에서 운영하던 공동묘지가 있었다고 알려준다. 우연히 보게 된 과거 기사가 옛 기억 속 소문을 떠올리게 했고 호기심도 자극해 언주 시립 공동묘지 관련 자료들을 계속 찾아보게 되었다.
미아리에서 반포리로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에 공동묘지가 설치된 기록은 1939년 3월 18일 <조선일보> 기사로 확인할 수 있다. 당시 경성부는 서울의 공동묘지들이 포화 상태라 시흥군 동면(지금의 신림동 일대)과 광주군 언주면에 각 10만 평의 땅을 구매해 공동묘지를 신설한다. 이때 언주 공동묘지는 경성부립(京城府立)이 되었고 해방 후 서울시가 행정 권한을 이어받은 것으로 보인다.
거의 20년이 흐른 후 언주 공동묘지가 다시 뉴스에 등장한다. 1957년 9월 여러 신문이 미아리 공동묘지를 옮겨야 한다는 취지의 기사들을 내보내는데 미관과 공중위생을, 미아리에 도시계획이 필요함을 이유로 내세운다. 주거지가 부족해 확장이 필요한 서울 부도심에 공동묘지는 방해물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기사들이었다.
결국 서울시는 미아리 공동묘지를 광주군 언주면으로 옮기기로 한다. 1958년 연말 즈음의 기사들을 보면 미아리 공동묘지의 연고자가 있는 분묘 6천여 기와 무연고 분묘 약 1만 3천여 기를 언주 공동묘지로 이장했다고 전한다. 신문기사들은 언주 공동묘지를 '서울시 지정 공동묘지'라거나 '서울시립'으로 표현한다.
한편, 1963년 1월 1일부로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은 서울시에 편입된다. 서울이 된 언주면은 성동구청 관할이었고, 구청에서는 이 지역에 언주출장소를 개설한다. 강남 개발이 본격화되자 언주출장소는 1973년에 영동출장소로 개편되었고 1975년에는 강남구로 승격한다.
1960년대 들어 언주 공동묘지 관련 기사는 설날과 추석 등 명절 즈음에 주로 볼 수 있다. 성묘객을 위해 임시버스를 언주 공동묘지까지 배치했다는 정보성 기사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1960년대 말부터 서울의 공동묘지에 변화가 생긴다. 공동묘지가 꽉 찬 것이다. 특히 망우리 공동묘지는 더는 매장을 할 수 없는 상황이고 언주 등 시립묘지들은 월평균 5백 기의 묘소가 늘어나는 형편이라는 기사를 볼 수 있다.
1970년이 되자 서울시는 강남에 묘지를 더는 허용하지 않고 기존에 있는 시립 공동묘지들도 서울 외곽으로 이전할 계획을 밝힌다. 당시 기사들을 종합하면 서울시는 강남 개발 계획에 유리하도록 <매장 및 묘지 등에 관한 법률>을 개정한다. 토지 이용을 원활히 하고 묘지 관리를 일원화 하는 목적도 있었다.
이에 따라 한강 이남의 8개 공동묘지의 분묘들은 1970년 6월부터 이장을 해야 했다. 8곳 중에 언주, 신사, 학동 등 3개의 공동묘지가 지금의 강남구에 있었다. 언주 공동묘지는 미아리에서 이장한 지 10년이 조금 지났는데 또 이장하게 되었다.
강남에서 공동묘지 찾기
강남구와 개포동의 역사를 검색하면 공동묘지와 관련한 언급이 없고, 서울시 자료를 뒤져봐도 과거에 시가 운영했었던 지금은 폐쇄한 공동묘지의 자료를 찾을 길이 없다. 다만 몇몇 블로거들이 글로 남긴 오래 전 기억의 잔상만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