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5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연방대법원 앞에서 한 낙태권 옹호론자가 낙태권 폐지 판결을 주도한 보수 성향 대법관들을 규탄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전날 여성의 낙태를 합법화한 지난 1973년의 '로 대 웨이드' 판결을 공식 폐기했다.
연합뉴스
- 안녕하세요. 먼저 간략히 자기소개 해주시고 어떻게 그리고 언제부터 레드 스타킹의 여성의 재생산권을 위한 투쟁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소개해주세요.
"물론이죠. 저는 미국 뉴욕시에서 자랐고 1969년에 레드스타킹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 해에 레드스타킹은 미국의 낙태 현황에 대해 처음으로 전국적인 연설이 있었습니다. 12명의 여성이 그리니치 빌리지의 한 교회에서 무대에 올라 300명의 대중 앞에서 자신 또는 친구의 낙태 경험 혹은 낙태 시도 경험에 대해 공유했습니다.
아무도 낙태, 특히 낙태와 관련된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과 그것이 의미하는 바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한 여성은 두 명의 정신과 의사가 자신이 아이를 가질 만큼 안정적이지 않다고 말했기 때문에 합법적으로 낙태를 할 수 있었고, 그것이 그녀가 한 일 중 가장 현명한 일이었다고 말했어요. 낙태를 한 또 다른 젊은 여성은 낙태를 하려고 10개의 의료기관을 전전했는데, 10번째로 방문한 병원은 불임수술에 동의하면 낙태를 해주겠다고 말했다고 전했습니다. 당시 그녀는 20살에 불과했는데 말이에요. 제가 말씀드린 건 이런 경험담 중 일부에 불과합니다. 이런 연설은 청중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사람들은 곧 일어나 자신의 이야기를 공유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전국적으로 울려 퍼지는 총소리 같았습니다.
투쟁의 때가 왔다고 느낀 사람들은 증언하기 시작했고 이는 시위의 물결로 이어졌습니다. 남성이 주도하는 낙태 관련 회의를 중단시키기도 했죠. 우리의 입장은 낙태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전문가는 의사도, 장관도, 정치인도 아닌... 바로 낙태를 했거나 했을 수도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낙태권 투쟁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낙태법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것은 거리에서의 투쟁이었죠.
사람들은 저소득층 여성이 낙태를 받을 수 있도록 낙태 시술법을 배우기로 한 여성 단체인 시카고의 제인 공동체(Jane Collective)처럼 '(이 문제에) 주목해야 해!'라고 외치기 시작했고 우리도 이에 가세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4년 후,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통해 전국적으로 낙태권 합법화를 이뤄냈죠."
-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혔을 때 어떠셨나요?
"매우 화가 났어요. 우선, 미국 국민의 대다수는 이 판결이 뒤집히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대다수는 어느 정도 낙태권을 지지하고, 특히 태아 생명권 법안(향후 제정될 것으로 예상됨)은 전혀 찬성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태아 생명권 법안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을 들으면 심각한 악법는 것을 알게 되죠. 하지만 우파는 대중의 의지에 반하더라도 앞장서서 이런 일을 감행합니다.
하지만 낙태가 합법화된 주에서는 법에 대한 혼란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많은 사람이 낙태 방조나 태아 상해 혐의를 받을까 두려워하며 유산과 관련된 상황에서도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상황도 발생합니다. 일부 주에서는 이에 대한 처벌이 엄격하기 때문입니다. 최대 99년의 징역형과 막대한 벌금이 부과될 수 있어요. 그래서 유산을 하고도 열흘 정도 하혈하면서 누가 봐도 생명이 위험한 상황에 처할 때까지 치료받지 못하는 여성들의 사례도 있었습니다. 낙태법이 가장 엄격한 텍사스에서는 의사가 무엇이 합법이고 불법인지 가늠하기 어려워하기에 유산 치료가 위험한 시술이 되었습니다.
자기 몸에 대한 통제권이 없다면, 어떻게 사회에서 평등한 주체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이는 사회에서 동등한 인간으로서의 여성에 대한 근본적인 공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