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봐도 질리지 않는 가을 풍경

등록 2022.10.19 13:50수정 2022.10.19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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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호강 청화쑥부쟁이
눈호강 청화쑥부쟁이용인시민신문

1년 365일 중 몇 번 없는 쾌청한 날이었다. 상쾌한 공기가 콧속을 파고들었다. 하늘에 뭉게구름이 피어올랐다. 적당히 서늘한 바람과 쪽빛 같은 하늘빛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집에만 있기엔 날씨가 너무 아름다웠다.

서둘러 산책 채비를 했다. 집을 나서며 콩과 팥이 잘 자라고 있는지 살펴봤다.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무성해진 고구마를 캐야 하는데 언제 캐야 하나 고민하던 중 옆집 마당에 있는 대추나무에 눈길이 갔다.


지금이 아니면 먹기 힘든 사과대추가 눈앞에 보이니 고민은 잠시 제쳐두었다. 손이 닿는 부분은 사람들이 오며 가며 따먹었는지 몇 개 없었고 손이 닿지 않는 높은 쪽에만 제법 달려있었다. '저걸 어쩔까?' 하고 노려보는데 집주인-이래 봐야 동네 친구인-이 나와서 맘껏 따먹으라 인심 썼다. 키가 큰 남편 덕에 대추를 몇 개 따서 맛있게 먹고 본격적인 산책길에 나섰다.

앞산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밤나무가 보였다. 아직 초록빛이지만 왠지 힘이 빠져있었다. 뜨거운 태양 빛의 여름날, 청춘처럼 탱글탱글하고 반짝이던 빛이 살짝 사라진, 조금은 측은한 마음을 들게 하는 나뭇잎은 차츰차츰 가을의 화려한 절정으로 다가가는 중일 거다.
 
 붉게 물든 화살나무. 화살나무 단풍은 지금이 절정이다.
붉게 물든 화살나무. 화살나무 단풍은 지금이 절정이다.용인시민신문

먼저 가을을 맞이한 집 앞 화살나무는 붉은빛을 어찌할 줄 몰라 했다. 나뭇잎 하나 둘 물들기 시작하던 것이 얼마 전인 것 같았는데, 화살나무 단풍은 지금이 절정이다. 햇빛에 반사되는 붉은 잎이 조명을 켜놓은 것처럼 화사했다. 아름답구나! 해마다 가을이면 만나는 아름다움이지만 단 한 번도 질리거나 지겨운 적이 없다.

오래된 인간 유전자 속에 담겨진 자연의 좋은 기억에 대한 결과일까? 감탄과 행복감도 잠시, 아쉬움이 뒤따랐다. 제발 좀 더 오래 붙어있으면 좋겠다. 이 아름다운 순간을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면 좋겠다. 오 헨리의 소설<마지막 잎새>의 주인공 마음을 가지게 되는 순간이었다.

마을 한가운데 있는 논을 지나쳤다. 지난 태풍과 가을비에 벼 대부분이 쓰려졌다. 남 논이지만 오지랖을 떨며 걱정했다. 쓰러진 와중에도 벼는 익어갔다. 어렸을 적에 가을이 되면 엄마는 벼 익는 냄새가 난다고 하곤 했다. 민감한 후각을 타고난 필자이지만 도대체 그 벼 익는 냄새는 알 수 없었다.

가을 문턱에 단풍이 들어가는 나뭇잎 냄새나 추석 즈음이면 풍기는 추석 냄새 등은 구별할 수 있었지만 벼 냄새는 잘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 필자가 벼 익는 냄새 이야기를 하던 엄마 나이가 되고 나니 그 벼 냄새를 느낄 수 있게 됐다. 벼가 익듯이 벼 냄새도 연륜이 쌓여야 맡을 수 있는 건가? 참 신기한 노릇이다.
 
 가을풍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억새
가을풍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억새용인시민신문

가을 저녁 햇살을 온몸으로 흡수하는 억새는 가을 풍경에서 거의 독보적인, 빼놓을 수 없는 풍경 중 하나이다. 논둑, 야산 초입, 찻길 옆에서 거센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꿋꿋이 버티고 있는 억새는 필자 정원의 필수템이다.


억새 종류는 요즘 정원요소로 한창 주가를 올리는 목초지정원(meadow garden)내지 자연정원(natural garden)의 필수요소로, 비싼 가격으로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모닝라이트, 그린라이트, 무늬억새 등 원예용으로 개량이 된 것도 있지만, 억새나 수크령, 개기장 등은 개량종 못지않게 아름답다. 그 아름다운 억새가 지금 지천에 펼쳐지고 있고, 필자는 그 모습을 보며 가슴이 저릿해진다. 공짜로 즐기는 정원이다.


동네 어르신 집 앞에 심어놓은 꽃 구경은 덤이다. 10월 하순으로 접어들면 색색의 국화가 산책길을 밝혀주겠지. 아직도 메리골드는 담장 밑을 화려하게 밝혀주고 있고, 보라색 형광빛을 내는 청화쑥부쟁이는 발걸음을 멈추게 만든다.

봄, 여름이 지나는 동안 존재를 잊고 있었던 여뀌 꽃은 길가에 분홍색 양탄자를 깔아주고 있다. 도시처럼 근사한 공원은 없다. 잘 정비된 산책로도 없다. 변변한 운동 시설은 상상도 못 하는 동네다. 그래도 자연이 선사하는 공짜 정원, 공짜 수목원이 눈 앞에 펼쳐지니 이 또한 감사한 일이다. 가을 산책이 즐거운 이유다.

- 송미란(생태환경교육협동조합 숲과들 생태활동가)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용인시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용인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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