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10월 17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서 열린 문일민 10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권기옥의 모습(사진 속 노란 옷). 문일민 후손들의 증언에 의하면 평남도청 투탄 의거를 계기로 시작된 두 사람의 우정은 동지 이상으로 끈끈하고 애틋했다 한다.
문일민 후손 제공
거사일은 8월 3일 오후 10시로 정해졌다. 평양 폭탄대는 조를 2개로 나눠 거사 담당 구역을 분담했다. 이때 문일민은 우덕선과 함께 평남도청을, 박태열과 장덕진은 평양경찰서를 맡았다.
거사는 의용단 평양지단과 합작으로 이뤄졌다. 일제는 김예진(金禮鎭)·여행렬(呂行烈) 등이 평남도청 투탄을 공모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의용단원들이었다. 의용단원 표영준(表永俊)과 유성삼(劉成三)은 거사 전 평양 시내 곳곳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최급경고문'(最急警告文)을 살포했다.
"시기가 절박함에 처하여 본 군영은 우리의 대의를 표창하고 일반 동포에게 최후의 기회를 주기 위해 다음의 경고를 내린다.
관공리에게 퇴직을 명령한다. 적의 기관인 관공리여. 너는 적의 이목이며 수족이다. 네가 없으면 적은 무엇으로써 설법 행정을 하겠는가. 적에게서 먼저 없애야 하는 것은 너희들이다. 가장 빨리 퇴직하라. 염연히 퇴직하지 않으면 무사히 벽력이 너의 머리 위에 임할 것이다.
정탐자에게 회개를 명령한다. 적의 주구인 너의 악관(惡款)은 적보다도 천배 만배이다. 너의 생명을 보전하고 너의 처자를 안전하게 하려면 곧바로 회개해야 한다. 뻔뻔하게 뉘우치지 않는다면 요망스러운 마귀를 청소하는 의검(義劍) 아래에 자식을 남김 없게 할 것이다.
자산가에게 출연(出捐)을 권고한다. 부호 제군이여. 금전의 노예가 되지 말고 독립사업의 재주(財主)가 되라. 자력(資力)에 상응하는 의금(義金)을 속히 출연하라. 여전히 전후 인색하여 의무를 행하지 않는다면 동포라고 인정하기 어렵다.
일반국민에게 의거를 권고한다. 형제자매여. 시기가 급박하다. 생사존망은 오늘에 있다. 대업성취는 이때에 있다. 어찌 방황 주저하여 구차하게 생을 도모하고 좌사(坐死)에 빠지는가. 맹렬히 분기하여 광복사업에 참가하라. 그렇지 않으면 국민으로서 간주하기 어렵다."
이들은 또 광복군총영 폭탄대원들이 평남도청과 평양경찰서를 폭파할 때 평양부청(平壤府廳)에도 폭탄을 던지기로 했다. 그러나 평남도청에 폭탄이 터지면서 주변 이목이 쏠리는 관계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1920년 8월 3일 오후 10시
마침내 거사 당일이 밝았다. 8월 3일 오후 8시 무렵, 문일민을 비롯한 폭탄대원들은 각각 양복과 일본식 옷(日服)으로 변장하고 각자 담당한 구역으로 이동해 대기했다. 그리고 거사 시간이 되자 동시다발적 거사에 돌입했다.
가장 먼저 거사를 시도한 구역은 평양경찰서였다. 장덕진이 평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졌으나 심지가 고장나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다. 장덕진은 새 심지를 가지러 숙소로 달려갔다. 이때 마침 잠시 헤어졌던 안경신이 뒤늦게 도착함에 따라 둘은 거사 후 다시 만날 장소를 정했다. 곧이어 장덕진이 다른 심지를 들고 평양경찰서로 달려가던 중 멀리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문일민이 평남도청 구내(構內) 제3부(경찰부) 사무실로 쓸 신축건물 동측 벽가에 폭탄을 투척하여 건물 일부를 파괴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폭발로 부근의 벽 표면이 훼손되고 주위에 직경 1촌 내외의 구멍이 13개소, 부근 유리창이 30장이나 파괴됐다.
미 의원단의 방한을 앞두고 한국 통치가 매우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음을 선전하려던 일제 입장에서는 당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일제는 모든 언론에 평남도청 사건에 대한 보도를 금지했다. 보도통제가 풀린 것은 8월 19일에 이르러서였다. 보도금지가 풀리자마자 한 언론에 거사 직후의 상황을 묘사한 기사가 실렸다.
"구내의 땅은 한 간통이나 두려빠졌고, 유리창은 모두 부서졌다. 어느 새에 모여든 경관떼는 안과 밖에 수라장을 이루었고 응원하는 군대들은 한 가운데 엄연히 둘러섰다. 월광에 번쩍이는 총검들이며 해쓱하고도 엄숙한 그들의 얼굴에는 분개한 빛과 전율한 빛이 번갈아 뵈인다. 그러나 가석타. 말 죽은 후 외양이니 무엇하리오." - '平壤의 爆彈事件' , <매일신보>, 1920.8.19.
폭탄으로 파괴된 평남도청, 얼굴 가득 노기를 띠고 있는 일제 군경들의 모습에서 문일민의 의거가 일제에게 얼마나 큰 충격과 분노로 다가왔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평남도청 투탄 의거는 일제 식민통치기구였던 평남도청에 폭탄을 던져 한국인의 자주독립 의지를 만천하에 알린 일대 쾌거였다. 특히 1920년 '독립전쟁의 해'를 맞아 북간도 봉오동·청산리 일대에서 우리 독립군의 대규모 항쟁이 있던 때 국내에서도 임시정부의 지시를 받은 서간도 지역 무장단체의 의열투쟁이 벌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일민은 그 중심에 서 있었다.
평남도청 투탄 의거의 주인공
그런데 평남도청에 폭탄을 던진 장본인의 정체에 대해 여러 설이 존재하고 있다.
대표적인 설을 살펴보면 의용단원 김예진이 17세의 숭실중학교 2학년생 김효록(金孝錄)과 함께 먼저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됐고, 이어서 문일민과 우덕선이 두 번째 폭탄을 던졌을 때 비로소 성공했다는 설, 안경신이 단독으로 평남도청에 폭탄을 던졌다는 설 등이 있다.
무엇이 진실일까. 우선 일제 당국은 사건 직후 평남도청에 폭탄을 던진 이는 김창수(金昌洙)와 문현철(文賢哲)이었으며 평양경찰서에 폭탄 투척을 시도한 것은 박태열·장덕진·안경신·이용목(李用穆)·김예진 등으로 파악했다.
문현철은 문일민의 다른 이름이었다. (김창수는 우덕선의 다른 이름으로 추정됨) 일제는 평남도청에 폭탄을 던진 범인 중 한 명으로 문일민을 지목했던 것이다.
결정적으로 김예진의 부인 한도신(韓道信)은 훗날 회고록을 남겨 평남도청에 폭탄 던진 장본인을 문일민이라고 증언한 바 있다.
"도청에 폭탄을 직접 던지신 이는 후에 애국지사로 같이 훈장 받으신 문일민 선생이고, 안내자는 내 남편이고, 폭탄 두 개를 사과 광주리 속에 넣고 사과 팔러가는 이로 가장하여 운반한 이는 안경신 씨였다고 한다." - 한도신 기록, 김동수·오연호 정리, <꿈갓흔 옛날 피압흔 니야기>, 민족문제연구소, 2016, 119쪽.
한도신의 증언은 상당히 구체적이다. 문일민과 함께 거사에 참여했던 남편 김예진에게서 전해들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처럼 여러 기록을 종합해봤을 때 문일민이 평남도청에 폭탄을 던진 사실은 분명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여성독립운동가 재조명의 흐름을 타고 그들의 삶을 소개하는 단행본들이 출간되면서 안경신이 평남도청 투탄 의거의 주역으로 묘사되는 경향이 있다. 안경신 역시 문일민과 함께 거사에 참여한 주역 중 한 명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