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경의 <호동서락을 가다> 표지최선경의 <호동서락을 가다>는 금원의 <호동서락기>를 바탕으로 쓴 에세이라 할 수 있다.
옥당
14살에 금강산을 유람하고 34에 유람기를 남긴 시인 금원
서녀로 추정되는 금원(錦園, 1817~1850년 이후)은 14세 되던 해(1830년) 남장을 하고 금강산 여행을 다녀와서 34세 되던 해(1850)년에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를 남긴 조선시대 문인이다. '호동서락'은 지금의 충청 4군인 제천, 단양, 영춘, 청풍에서 시작하여 관동의 금강산을 거쳐 규당학사 김덕희의 소실이 된 후 관서 지방에 동행했다가 다시 낙양(서울)로 돌아왔기 때문에 '호동서락기'라 이름 한다고 했다.
"평생을 돌이켜보니 맑은 곳에서 놀고 기괴한 곳을 돌아다니며 이름난 곳 거의 다 보았으니 남자가 할 수 없는 것을 했다고 여겨진다. 그러니 내 분수에도 족하고 소원 역시 보상되었다고 할 것이다. (중략) 생각건대 지나간 일과 경관은 눈 깜짝하는 한순간의 꿈이니, 진실로 글로 전하지 않으면 누가 지금의 금원을 알겠는가!" - <호동서락을 가다> 중에서
금원은 <호동서락기> 말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를 곁들인 기행문집을 남긴 이유를 밝힌 셈이다. 신분의 한계에 대한 자탄과 소원 성취에 대한 자족감, 문인으로서의 정체성,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는 말로 다가온다.
그는 자신의 출신을 자세히 밝히지 않고 있는데 사람으로 태어난 것과 문명국에 태어난 것은 다행이나 여자로 태어난 것과 한미한 집안에 태어난 것은 불행이라고 했다. 그의 어머니가 기녀로 알려진 것으로 봐서 자신도 신분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인식을 일찍부터 했을 것이다.
금원은 어릴 때 병약하여 부모가 여자로서 할 일을 배우게 하지 않고 문자를 가르쳤다고 한다. 글쪽으로 재능이 뛰어났는지 오래지 않아 경사(經史)를 대략 통하고 고금의 문장을 배워 어릴 때부터 자주 시문을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계례(성인이 되었다는 의미로 여자가 쪽을 찌어올리고 비녀를 꽂는 의식)를 올리기 전 부모를 설득하여 금강산을 비롯한 승경을 보고 돌아오겠다고 오랜 간청 끝에 허락을 받아 유람 길에 올랐다. 이는 당대 여인들이 사회적 규제로 여행이 자유롭지 못했던 만큼 어린 나이임에도 독보적이고 파격적인 행보를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호동서락기〉의 마지막 부분은 남편 김덕희가 벼슬에서 물러나 한강변에 있는 용산 삼호정에서 거처할 때 '삼호정시사'라는 시회를 주도하며 생활했던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는데 그때 함께 했던 문사들이 연천 김이양의 소실인 운초, 송호 서태수의 소실인 박죽서, 주천 홍태수의 소실이며 금원의 동생인 경춘, 화사 이상서의 소실인 경산이다. 이들은 자하(紫霞) 신위(申緯) 등 당대 시단의 주류였던 남성 문인들과도 시로서 교유했다.
"시문서화로 매일의 일을 삼고 산수풍월과 연운화조(烟雲花鳥:안개와 구름, 꽃과 새)로 집을 삼아 날마다 그 속에서 노래하고 읊조리며 오로지 가슴속 번민을 쏟아내어 무료한 기운을 불사른다. 하지만 용모는 은화하고 부드러우며 단정하여 면복(최고의 예복)을 입고 옥을 찬 것 같다. 내어놓아도 함부로 흐르지 않고 즐겨도 거칠지 않으니, 신령스러운 지혜가 촉발되어 시문으로 나타난 것이 이 책이다." - <호동서락을 가다> 중 인용
<호동서락기>의 후기를 쓴 금원의 동생인 경춘의 서평이다. 기녀의 신분임에도 함부로 살지 않았고 단정하고 기품이 있었음을 강조하며 여자로 태어나 재주가 뛰어나도 쓰이지 못하니 그 번민을 시문으로 표현했다는 탄식이며 시인이었던 자신들에게 바치는 헌사인 셈이다. 금원의 문학적 재능에 대한 감탄은 추사 김정희의 뒤늦은 고백에서도 발견된다.
추사 김정희도 놀란 금원의 문학적 재능
"금원의 제문을 얻어 읽어보니, 그 문장이 정에서 나온 것인지, 문장에서 정이 나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 아파하며 곡진하고 도타운 슬픔과 애통함이 족히 사람을 감동하게 할 수 있는데 오히려 이것은 두 번째입니다. 어찌 이처럼 기이한 글이 있단 말입니까? <중략> 화장을 짙게 한 여인의 기미는 한 점도 없고 옛날 여사(女士)의 요조한 품격만 있어, 턱 아래 3척의 수염을 휘날리고 가슴속에는 5,000자의 글을 담고 있는 제가 곧장 부끄러워 죽고만 싶을 뿐입니다." - <호동서락을 가다> 중에서
추사는 금원의 글을 보고 자기 가문에 재능 있는 사람을 일찍 알아보지 못한 탄식을 하며 '비단 같은 작은 마음속에 거대한 바다와 높은 산을 감추고 있어 헤아릴 수 없는 사람'이라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글을 남길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