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거리신림동 고시촌의 중심을 형성하던 녹두거리. 1980년와는 대조적으로 한적한 모습이다.
이영천
고시촌의 마을 이름은 대학동으로, 행정구역으론 서울대학을 망라하는 넓은 공간이다. 관악산에서 발원한 구불구불한 도림천을 사이에 두고, 고시촌은 맞은 편 서림동에도 퍼져있었다. 1980년대를 지나며 대학동 골목을 '녹두거리'로 불렀고 '독재 권력의 주구가 되려 한다'며 이곳 수험생을 비아냥대기도 했다.
소설가 이호철이 '서울은 만원이다'라는 소설을 신문에 연재하던 때인 1966년, 서울 인구는 377만 명이었다. 한강 이북과 영등포를 망라한 공간에 한정된 숫자이니 지금 보아도 가히 만원이다. 전쟁이 끝난 1954년 124만, 1959년 200만, 1967년 400만, 1970년 500만이니, 불과 16년 만에 380만 명이 서울로 몰려든 셈이다.
이는 전적으로 사회변동으로 인해서다. 여기에 폭발적 인구 증가를 상징하는 베이비붐도 같이 밀려온다. 1963년 서울시는 행정구역 확장으로 이에 대응한다. 서울로 몰려든 사람들은, 변두리에 빈민촌을 형성한다. 당장 생계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거주 공간 확보와 안정된 취업,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 개선이 우선이다. 하지만 나라는 폭발적으로 몰려드는 인구를 수용할 능력도 생각도 없었다.
서울은 빈민이 점거한 도시로 변해간다. 산등성이를 비롯한 빈 땅이 판잣집으로 꽉 들어찬다. 이들은 주로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두꺼운 종이상자·루핑·목재·아연철판 등을 사용해 집을 짓는다. 무척 열악한 주거환경이다.
1961년 8만 8천여 동, 1964년 11만 6천여 동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런 상황에서 도로 및 상하수도 등 기반시설은 그림의 떡이다. 하물며 위생을 따질 계제인가? 나라는 이들이 사는 집에 '무허가 불량 주택'이라는 영광스러운 딱지를 붙여 준다.
빈민촌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환경이 열악했다. 비바람도 막아내지 못한다. 분뇨는 일상적으로 발에 차인다. 마시는 물은 말할 것도 없고 생활 쓰레기는 그 자체로 재활용품이다. 빨래와 목욕은 언감생심이다. 위생은 물론 난방과 기초 생활도 해결 난망이다. 거지 떼가 몰려 사는 모습 다름 아니었다.
선거철이면 의례 선심을 베푼다. 입으로 떠벌이는 허가였고 합법 승인이었다. 선거가 끝나면, 빈민촌은 더 넓어진다. 자유당 정권 말기부터 1960년대 내내 행해진 '정착촌 조성'도 큰 몫을 담당한다. 일종의 '무대책 철거 이주 정책'이었다. 오로지 도심에서 좀 더 먼 곳으로 쫓아내려는 행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