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윤씨 녹우당녹우당은 양반사대부가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민가로 해남윤씨 윤항의 아들 윤관중은 유희춘의 사위다.
정윤섭
조선시대 양반 사대부들은 어떻게 집을 지었을까? 김홍도의 풍속화 '기와이기'를 보면 집짓기의 모습을 대강 짐작해 볼 수 있지만 구체적인 과정을 알기는 어렵다.
당시 지방의 양반 사족들은 자신이 태어나 살았던 입향처에 집을 신축하는 경우가 많았다.
생활의 근거지이자 사족으로서 정치적 근거지이기도 한 향리에는 여러 인맥들이 서로 얽혀있었다. 이들은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 교류할 수 있는 사랑채와 같은 공간이 필요하였다. 또한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사회였기 때문에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봉제사를 위해 사당을 짓는 것도 집짓기의 중요한 이유였다.
유희춘의 향리 해남에 집짓기
유희춘은 결혼 후 처가인 담양 대곡에 가서 살게 되지만 담양에 있는 동안뿐만 아니라 관직에 진출해 있는 동안에도 해남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한다. 해남에는 자신의 첩과 오천령에게 시집간 누이가 살고 있었고 특히 사위인 윤관중의 해남윤씨 집안과 혼맥을 통해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서 집은 해남에서 이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매우 필요하였다.
유희춘은 오랜 유배 생활로 해남의 옛집이 퇴락하여 거주하기가 어렵게 되고 부모의 신주도 누이가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집을 새로 짓는 것이 매우 시급한 문제였다. 유희춘은 유배에서 풀려나 관직에 복귀한 몇 개월 후인 1568년 3월부터 집을 짓기 시작하여 1571년 4월까지 약 3년여에 걸쳐 해남읍성 서문밖에 집을 새로 짓는다.
집의 규모는 대략 47간 이상의 규모로 아주 큰 규모의 집은 아니었던 것 같다. <미암일기>에는 집의 구조가 북루, 남루, 중루, 서루, 중대청 동퇴, 서퇴, 대청, 행낭 등으로 구성되었다고 나와 당시 양반 사족의 민가 구조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대강 짐작해 볼 수 있다.
유희춘이 집을 지을 무렵 경제적 상황은 그리 좋지 않은 형편이었다. 그러나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그의 높은 관직의 지위나 지방의 일가친척 등 재지사족 들과의 인적 관계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유희춘은 집을 짓기 위해 가장 먼저 땅이 필요하였는데 생가 근처에 살던 낮은 관직의 무반이었던 이억복이라는 사람이 집터를 희사한다.
집터를 희사한 것은 그냥 주는 것이 아니었고 나중에 유희춘을 통해 관직 진출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집터를 제공하고 물품을 수시로 가져와 유희춘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결국 1568년 5월 제주군관에 임명되게 된다.
집짓기는 지방관의 도움으로
집을 짓기 위해서는 목재나 기와, 석재 들이 필요하였다. 이를 구입하기 위해서는 많은 비용과 인력이 필요하였는데 이 과정을 보면 지방관들의 도움을 많이 받는 것을 알 수 있다.
유희춘은 해남 인근 진도군수 이훤국에게 기와 굽는 것에 필요한 재원을 요청한다. 또한 가리포 첨사 이선원에게는 목재를 부탁하였다. 또한 정강옥에게는 집짓기 감독인 감역을 청하였다. 이렇게 하여 집을 짓기 위한 기본적인 준비를 마친다.
유희춘은 본격적으로 집을 짓기 위해 1569년 10월 휴가를 얻어 향리로 내려오기 까지 한다. 그는 전라감사로 재직하던 1571년 4월까지 약 1년 6개월간에 걸쳐 집을 짓는데 이때 목재는 완도의 가리포진과 진도의 남도포진에서 무상으로 지원받으며 전라수사 소흡, 가리포 첨사 이계남, 남도만호 이은우와 같은 지방관들이 도움을 준다. 이들 지방관에게 목재를 요청하면 지방관은 벌목할 수 있는 제반 절차를 밟아 주는 식이었다.
1569년 기사년 11월 28일
진도군수 이엄이 800명의 군사로 남천의 재목을 운반해 주겠다고 알려왔다.
1570년 경오년 7월 7일
집에 돌아와 해남 식구들의 편지를 보니 가리포에 베어둔 수장목 345개를 모두 실어 소천으로 옮겨왔으며 성주가 지킬 사람을 정해두고 7, 8월의 농한기에 운반할 것이라고 했다.
기와는 인근 사찰인 대둔사에서 구웠는데 약 10만장 정도의 기와가 필요하였다. 유희춘은 1569년 12월 초 완성된 기와를 집 짓는 곳으로 옮기게 되는데 기와가 부족하게 되자 일부는 별와서(別瓦署)에서 구입하였다. 중앙관서를 통해 기와를 구입할 수 있게 된 것도 유희춘이 고위 관료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1571년 1월 중순부터는 온돌석을 실어 나른다. 온돌석은 인근 성산에서 채취하여 집으로 옮겼는데 온돌석의 운반을 위해 전라수사 박해가 우마와 관노를 지급하였고 유향소 사마소의 사령과 노복이 동원되었다.
유희춘이 유력한 현직 관료라는 영향력 때문에 인근의 지방관은 집을 짓는 것에 소홀히 할 수 없었다. 해남현감을 비롯한 인근의 수령과 전라감사, 수사, 병사, 첨사는 유희춘의 집짓기가 중요한 현안이었던 것이다.
1569년 기사년 11월 초7일
성주 임응룡이 황원에 명하여 일꾼 50명을 보내 이틀간 일을 해주게 하니 바로 땅을 다지는 일꾼이다.
대목수 매손이 황원에서 왔다. 성주 임응룡이 보낸 것이다. 즉시 옛 집 뜯는 곳에 가보게 하고 내일 땅을 닦는데 공사工師로 삼았다.
지방 양반 사족들의 도움
집짓기는 해남 인근 지방 사족들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 그중에 해남윤씨 집안은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주었다. 녹우당으로 대표되는 해남윤씨는 해남에 근거지를 둔 대표적인 지방사족으로 윤항은 사위인 윤관중의 아버지였다. 이 때문에 집을 짓는데 여러가지 도움을 주게 되며 윤관중은 기와 옮기기, 초석운반, 온돌석 옮기기, 벌목 등의 각종 잡역을 담당하며 사실상 집짓기를 진두지휘하였다.
1568년 3월 7일
노奴 석정石丁이 와서 이르기를 "기와를 굽는 일은 대둔산에서 2월 20일에 일을 시작하겠다고 하고 가리포의 재목은 윤관중이 들어가서 직접 배에 싣는 것을 감독하여 노奴 한수漢守가 가져오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며…
1568년 5월 4일
윤관중의 편지에 이르렀기를 "기와를 굽는 일은 5월 보름 전에 끝날 것이고 재목은 몸소 완도에 들어갔던 바 첨사가 접대해주기를 심히 후하게 해주고 배 세척에 실어 보내주었는데 20여간의 집을 지을만하며…
해남윤씨 집안에서는 윤항, 윤행, 윤복이 노비를 비롯 물품을 통해 지원하는 등 적극적으로 유희춘의 집짓기를 지원하였다.
유희춘이 집을 지은 곳은 해남읍성의 서문 밖이었다. 이 때문에 부인 송덕봉은 이를 보고 이곳은 바닷가와 가까워 왜구가 쳐들어오면 관에서 집을 철거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기도 한다.
해남현이 자리잡고 있는 해남읍성은 해창만을 따라 바닷길이 내륙으로 깊게 들어와 읍성 가까운 곳까지 이르기 때문에 이러한 염려도 당연한 것이었다. 실제로 1555년 5월 달량진에 왜구 70여척이 쳐들어와 해남을 비롯, 강진, 진도 등을 함락하여 쑥대밭으로 만든 일이 있었다. 이때 싸움에서 유희춘의 누이 남편인 매부 오천령이 전사하기도 하였다.
집은 기본적으로 주거 공간이었지만 조선시대 지방의 양반 사족들에게는 사랑채라는 공간을 통해 끊임없이 교류하고 사당에 제사를 지내는 등 당시의 사회상을 그대로 반영한 결과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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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를 중심으로 지역의 다양한 소재들을 통해 인문학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 특히 해양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16세기 해남윤씨가의 서남해안 간척과 도서개발>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바 있으며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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