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도재 고갯마루. 오도재 고갯마루에 지리산제일문(智異山第一門)의 성루(城樓)가 관문처럼 지키고 있다.
이완우
지안재에서 지리산 방향으로 3.8km 나아가면 오도재 고갯마루에 지리산제일문(智異山第一門)의 성루(城樓)가 관문처럼 서 있다. 성루는 1층은 성곽의 길이 38.7m, 높이 8m, 너비 7.7m이고 2층에 단정한 누각이 있는 제법 큰 규모로, 왕복 2차선 도로가 두 개의 성문을 통과한다. 오도재는 연비지맥의 산줄기인 삼봉산(1187m)에서 법화산(991m)으로 이어지는 안부로 삼봉산으로 향하는 등산객이 이 고갯마루에서 출발한다.
오도재에는 스님들이 이 고개를 넘으며 도를 깨우쳤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오도재 전설의 주인공을 청매 인오(靑梅 印悟, 1548-1623) 선사라고 한다. 그러나 오도재라는 지명이 더 오래되었기에, 고려 시대의 보조 지눌(普照 知訥, 1158-1210) 국사의 '오도견성(悟道見性)'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오도재는 판소리 변강쇠가(가루지기타령)의 배경지로 의미 있다. 조선 시대 후기에 유랑민이었던 변강쇠와 옹녀가 지리산의 품인 오도재 인근에 정착하였다는 설화가 전해온다. 변강쇠가에 나오는 지명인 등구마천 가는 길은 오도재 길과 일치한다. 변강쇠는 옹녀가 나무를 해오라고 하자 산에서 등구마천의 나무꾼들과 어울려 놀다가 저물녘에 나무 장승을 뽑아간다.
이 때에 둥구마천 백모촌에
여러 초군 아이들이 나무하러 몰려 와서 지게 목발 뚜드리며
방아타령, 산타령에 농부가(農夫歌), 목동가(牧童歌)로 장난을 하는구나.
(중략)
사면을 둘러보니 둥구마천 가는 길에
어떠한 장승 하나 산중에 서 있거늘 강쇠가 반겨하여,
벌목정정(伐木丁丁) 애 안 쓰고 좋은 나무 저기 있다.
일모도궁(日暮途窮) 이내 신세 불로이득(不勞而得) 좋을씨고.
동리 신재효(申在孝, 1812-1884)는 춘향가, 심청가, 홍보가, 수궁가, 적벽가와 변강쇠가(변강쇠타령)의 판소리 6마당을 정리하였다. 변강쇠타령은 가루지기타령, 횡부가(橫負歌), 송장가, 변강쇠전이라고도 한다.
변강쇠가는 온달설화와 같은 상여부착설화(喪輿附着說話), 아홉 번 결혼한 여자의 이야기인 구부총설화(九夫塚說話), 장승 동티의 민속적 금기(禁忌)와 시체를 가로지는 관습적 사실 등이 결합하여 형성된 것이다. 가루지기는 옛날에 평민이나 천민이 상여 없이 시신을 거적에 말아 지게에 지고 산으로 가서 묻었던 치상(治喪) 방식이었다.
잡놈이라 배척받는 부평초 같은 변강쇠는 남쪽 지방의 유랑민이고 과부 운명을 팔자로 타고나서 마을에서 쫓겨난 옹녀는 북쪽 지방의 유랑민으로 볼 수 있다.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어도 유랑할 수밖에 없다. 옹녀는 살아보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는데, 변강쇠는 옹녀가 모아놓은 작은 재물까지 다 탕진한다.
결국 이 부부는 유랑 생활을 그만두고 지리산에 머물게 된다. 변강쇠가 나무하러 가서 장승을 빼어 오고 장승을 패서 장작을 만들어 아궁이에 군불로 땐다. 변강쇠는 자다가 장승 동티로 장승처럼 선 채로 죽는다. 여기까지가 작품의 전반부 1/3 분량의 내용이다.
작품의 후반부 2/3의 분량은 옹녀가 변강쇠의 초상을 치르는 과정이다. 옹녀는 초상을 치러 주는 남자와 같이 살겠다며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초상을 치르러 온 유랑민 남자들도 차례로 변강쇠의 시체에 붙어서 죽는다. 이윽고 굿판이 벌어지고 시체들이 분리되며 초상을 치르게 된다. 시체들의 초상을 치른 한양의 재상댁(宰相宅) 마종(馬從)인 뎁득은 옹녀 곁을 떠난다.
옹녀는 유랑민의 처지로 어떻게든 정착하여 살아보려는 백성이었다. 지리산은 사회에서 소외되고 버림받은 백성들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생명의 땅이었다. 변강쇠전의 중심 테마는 외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에서 일부 나타난 음담패설은 변강쇠와 옹녀의 원초적 본능을 해학과 골계로 표현한 문학적 장치라고 볼 수 있다.
변강쇠가는 조선 시대 후기 유랑민들의 비극적 생활상을 희극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변강쇠가 장작으로 패서 불 땐 장승은 봉건 시대의 윤리와 사회 질서를 상징할 수 있다. 장승처럼 서서 죽은 변강쇠의 시체는 어쩌면 우뚝 서서 사람 사는 세상을 염원하는 새로운 장승이 아닐까?
변강쇠에 대한 재해석을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