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운행을 시작한 '통일호'는 황폐화된 한반도 위를 주파하는 가장 빠른 교통수단이었다.
한국철도차량 백년사(퍼블릭 도메인)
1956년의 어느 날, 부산에서 서울로 가던 '초특급 열차'가 있었다. 쌈짓돈을 모아, 가산을 모두 싸맨 승객들의 꿈을 싣고 달리던 이 열차는 운행한 지 겨우 2년 밖에 되지 않은 최신 열차였다.
당시 철도 상황이 열악했다고는 하지만, 이 열차는 고출력의 '파시형' 증기기관차나 최신예 디젤기관차가 연결되곤 했던, 이른바 '신경 쓰는 열차'였다. 하지만 이 열차는 뜻밖에도 기관차 고장으로 대전역에 멈춰 섰다. 기관차 고장의 사유로 지연되는 일은 있어도 운행이 중단되는 경우는 흔치 않았던 일이었다.
이 고장으로 인해 열차에서 내린 실향민 가족은 지금의 대전을 대표하는 빵집, 성심당을 창업했다. 사소한 열차의 고장이 한 가족, 나아가 한 지역의 역사를 뒤바꾼 선택이 되었던 셈이었다.
그리고 고장이 났던 열차의 이름은 '통일호'다. 1950년대에는 흔치 않았던 '대국민 명칭 공모전'을 통해 등장한 통일호는 6.25 전쟁으로 황폐화된 서울과 부산 사이를 9시간에 연결했다. 6월 28일 철도의 날을 맞아 전쟁 직후 시름했던 대한민국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던 통일호의 역사를 조명한다.
만신창이였던 한국 철도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는 일본과 대륙을 잇는 교통망으로 한반도를 이용했다. 도쿄에서 기차를 타고 시모노세키로 가서 부관연락선으로 바다를 건너면 부산역에서 경성을 거쳐 베이징까지 가는 특급열차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운행했다. 노조미, 흥아호 등 여러 열차가 운행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빠른 열차는 '아카츠키'였다.
일제의 민족 말살 통치가 이어졌던 1936년 개통한 아카츠키는 최소 시속 90km/h의 속도로 한반도를 질주했다. 당시 아카츠키가 부산과 서울을 이었던 시간은 6시간 40분. 당시의 열악한 선로 사정에도 불구하고 서울에서 점심을 먹은 뒤 '티 타임'까지 갖고 출발하면 부산에는 자정 전에 닿는 '폭주기관차'였다.
해방을 맞이한 직후인 1946년에는 영등포공작창에 모인 조선인 기술자들의 손으로 만든 첫 번째 객차와 기관차로 구성된 '조선해방자호'가 운행했다. 9시간 40분이라는 비교적 긴 운행 시간에도 불구하고, 조선해방자호의 개통은 퍽 감명 깊은 일이었다. 한국의 땅에서 한국인의 손으로 만든 열차가 처음으로 기적을 울렸기 때문이다.
조선해방자호는 경부선을 운행하는 한편, 호남선을 중심으로 '서부해방자호'가 운행하기도 했다. 증속을 거쳐 9시간 20분 만에 서울과 부산을 잇기도 해다. 하지만 조선해방자호가 운행을 시작한 지 겨우 4년 만에 6.25 전쟁이 발발했다. 다른 산업이 안 그랬겠냐마는, 철도는 쌓아 왔던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그리고 6.25 전쟁은 광복 이후 잠시나마 되찾은 '철도 주권'이 박탈되었던 계기이기도 했다. 광복과 정부 수립을 거쳐 짧은 시간이나마 철도 운영에 대한 주권을 갖고 있었던 대한민국의 철도 운영권이, 6.25 전쟁으로 인한 군사 작전상의 이유로 유엔군으로 넘어갔던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