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여자들은 세계를 만든다> 표지 이미지
창비
- 왜 여성을 주제로 잡았나요? 만난 분들이 다 여성은 아니었을 텐데요.
"북조선 사람들을 만나면서 전쟁, 식민, 분단, 냉전과 탈냉전, 세계화 등 한반도가 겪어온 역사적 경로에서 여성들의 위치가 남성들과는 다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이건 남한도 비슷한 측면이 있어요. 한반도의 역사적 궤적을 저희 어머니나 할머니 같은 여성들이 어떻게 경험했는가에 대해선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개인의 삶, 특히 여성을 통해 체제의 모순과 역사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또 하나는 북조선 여성들의 삶을 보면서 남한에 사는 우리의 삶과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드러낼 수 있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저는 이걸 거울 상이라고 표현하는데요. 북조선과 남한의 사람들의 삶은 생각보다 많은 것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 관련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 보겠습니다. 북조선 여성인 길건실이 딸에게 쓴 편지에 이런 문장들이 있습니다. '죽도록 일을 해도 내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네가 의무만을 잔뜩 짊어진 채 살기보다는 조금은 다른 삶을 살기를 바랐단다', '어찌 당과 국가, 수령님이 나보다, 내 가족보다 중요할 수 있겠니' 예시로 든 문장들은 당이나 수령님 같은 워딩만 조금 바꾸면 남한 사회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크게 무리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네. 맞습니다. 실제로 북조선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이런 내용들이 많습니다. 사회주의를 믿어서 열심히 일했는데 내 자식들은 밥도 못 먹더라, 대단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는데 결국 남한에 내려와 있다는 얘기들이죠. 국가를 위해서 희생하고, 사회가 원하는 대로 살고, 치열하게 일했지만 정작 삶은 나아지지 않습니다.
본인은 어쩔 수 없지만 내 자식만큼은 나처럼 살지 않길, 좀 편한 삶을 살길 바라는 면을 많이 볼 수 있어요. 이런 모습을 통해 우리나라는 과연 얼마나 다른가를 한번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누구보다 오랜 시간 노동하지만 가난은 계속되고 가진 사람들은 계속 잘 먹고 잘 사는 공고한 구조 속에 있다는 건 남한이나 북한이나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래서 북조선 여성 중에선 자식에게 과외를 시켰다는 분도 있고, 예전에는 중국어를 시켰지만 영어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이제 영어를 시킨다는 분도 있었어요. 저는 책을 통해서 그런 여성들의 의식변화, 어떤 새로운 시도들에 대해서도 알리고자 했습니다. 그런 각자의 자리에서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어쩌면 지금 우리 세대의 여성들이 조금 더 나은 상황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남한이든 북한이든 말이죠."
- 현재 남한의 일반 대중들이 북한에 대해 갖는 생각은 대략 둘로 나뉘는 것 같습니다. 무찔러야 하는 우리의 적 아니면 헐벗고 못 먹고 못 사는 사람들... 하지만 <살아남은 여자들은 세계를 만든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습니다.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의지와 좌절 같은 복합적인 감정과 다양한 삶의 궤적이 가지런히 담겨 있습니다. 여기엔 저자의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우선 첫 번째로 말씀드리고 싶은 건, 이 책은 일반적인 사회과학 도서와는 다르게 소설이나 에세이 형식을 차용하기도 했고,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사실을 기반으로 재구성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 바탕은 인터뷰나 증언입니다. 그들에겐 흑백으로 보여지지 않는 너무나 다양한 모습들이 있었어요. 사람들이 다 그렇듯이 말이에요."
- 이 질문 자체가 저의 편견이었다는 생각이 드네요(웃음)
"동시에 저의 편견이기도 했습니다. (웃음) 어쩌면 우리 모두의 편견이기도 하죠. 처음 그들을 만났을 때 저는 필드 노트에 못 먹고, 못 살고, 교육을 못 받았을 거라고 쓴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실제로 만나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분들이 전반적으로 힘들게 사는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런 모습만 있는 건 아닙니다. 어떤 측면에서는 우리보다 훨씬 더 강한 부분도 있고, 아주 솔직하게 욕망을 드러내기도 해요. 그런 다양한 모습들이 있는데 우리가 보는 건 정해져 있습니다.
어쩌면 이게 <살아남은 여자들은 세계를 만든다>를 써야겠다고 생각한 첫 출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가진 다양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북조선 여성들은 이렇다는 어떤 고정관념을 깨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의도했냐고 물어본다면, 의도하지 않았다고 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저 제가 만난 분들이 그랬으니까요."
"다른 방식의 사유가 '분단 패러다임' 깰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