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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 앞둔 '전설'의 미용사 "몸은 늙어도 기술은 안 늙습니다"

50년 가까운 경력에도 계속 배우는 옥천 염미용실 염순옥 원장의 일과 진심

등록 2023.03.25 11:17수정 2023.03.25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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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천의 미용사(史)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곳이 있다. 옥천읍 금구리 가장 번화한 상권에 위치한 '염미용실'이다.
옥천의 미용사(史)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곳이 있다. 옥천읍 금구리 가장 번화한 상권에 위치한 '염미용실'이다.월간 옥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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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가위가 아니다, 돈도 빽도 없던 그녀의 자부심 https://omn.kr/237ms

충북 청주 미용사이던 그가 옥천 미용사가 된 과정에는 약간의 사고(?)도 있었다. 1977년 10월 3일, 그는 이 날짜를 잊을 수가 없다. 사고(!)와도 같은 운명(!)의 날이기 때문이다.


"미용 일을 하다 보니 아무래도 유행에 민감할 수밖에 없잖아요. 청주에서 일하며 유행을 읽는다고 나름 노력했는데, 손님들이 '아가씨는 대전 가서 배워봐도 좋겠다'고 그래. 청주보다 대전이 더 크고 미용업도 더 호황이었거든요. 그 길로 대전 은행동으로 갔지요. 그때만 해도 미용용품, 약제 취급하는 재료상이 미용실 취업도 연계해줬어요. 거기 사장님이 '대전시 옥천동에 갈만한 미용실이 있다'대. 딱 한 달만 봐주면 된다고, 한번 가보라고."

그가 '대전시 옥천동'으로 알고 온 곳은 이제 막 소도시 가꾸기 사업이 시작되는, 1~2층짜리 낮은 건물이 오밀조밀 모인 작은 농촌 '충북 옥천군 옥천읍'이었다. "속았구나" 싶었지만 막상 옥천 미용실 원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일을 안 해줄 수가 없더"란다. 그때 일했던 곳이 지금은 사라진 '오고파 미용실'이다. 염순옥 원장을 비롯해 백미용실 원장 등을 배출한 곳이니 옥천 미용사에서도 빠질 수 없는 역사적 장소.

"한 달만 일해주기로 하고 시작했는데, 그게 정이 들어서 몇 년을 있었던 거예요(웃음). 연고도 없는 곳에서 배짱도 좋았지. 그때만 해도 젊고 도전 정신이 번쩍였어요. 이제 겨우 22살이었던 걸요."

결혼 생각이 없던 그가 이곳에 와 일하며 남편(이성세씨)을 만나 백년가약을 맺기도 했으니, 여러모로 인생의 전환점이 된 '대전시 옥천동 미용실' 사건이다. 

염미용실의 전성기


그렇게 옥천에 온 뒤 계속 오고파 미용실에서 일했던 그는 1981년 결혼과 함께 잠시 미용 일을 쉬게 된다. 하지만 이는 정말 '잠시'였다. 곧 첫째 아들을 배 속에 품은 상태에서 자신만의 미용실을 개업하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는 '염미용실' 상호와 관련한 일화도 하나 있다.

"그때만 해도 미용실을 하려면 결핵 검사를 해야 했어요. 보건소에 가서 엑스레이를 촬영해야 하는데, 임신했다고 하니 배를 가릴 수 있는 무겁고 두꺼운 치마 같은 걸 주더라고. 그걸 배에 두르고 엑스레이를 찍는데, 위생계 계장님이 가게 이름은 지었냐고 묻대. 등록하려면 상호가 필요하니까. 아직 못 지었다고 하니, 그러면 성씨를 따서 '염미용실'로 하래. '다음에 바꾸세요' 그러더라고. 근데 그걸 안 바꾸고 계속 쓴 거지."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군청 위생계 '육 계장님'은 이후 염순옥 원장을 만날 때마다 "미용실 이름 제가 지어드렸습니다"는 농을 던지곤 했다고.

그렇게 열게 된 미용실은, 염순옥 원장의 천직이라곤 하지만 만삭의 몸이 감당하기엔 힘이 들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제대로 된 시설 마련이 문제였다. 일단 가게 자리를 얻고 이름도 정했는데, 미용시설을 채워 넣기엔 돈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당시 가정 형편상 그가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터라 주변에 손 벌릴 곳도 없었다. 그러던 때 마치 구세주처럼 등장한 이가 있으니 바로 대전 재료상 '대성사' 사장이었다. 염순옥 원장에게 '대전시 옥천동 미용실'을 소개한 이다.

"가게는 얻어 놨는데 시설은 없고... 대성사 사장님을 찾아가서 한탄을 했는데, 그 사장님이 그러셔. '자네 옥천사람 만든 게 나이니, 내가 도와야지.' 정말 미용실 기자재 하나부터 열까지 다 해주셨어요. 그러면서 10년 후에 갚으라고... 눈물 나게 고맙죠. 10년 후에 갚으라셨지만, 그게 어디 그래요? 그분도 장사하는 분이니, 저도 힘닿는 대로 최대한 빨리 갚았어요. 그 와중에 나도 배짱도 좋지, 직원을 둘이나 구해서 개업을 했으니(웃음)."

옥천읍 금구리 7-11, 현재 백미용실 자리에 3~4평 남짓한 규모로 문을 연 염미용실은 의자를 단 3개 놓고도 통로가 좁아 간신히 걸어 다녀야 했을 정도로 작은 공간이었다. 그럼에도 손님은 끊이지 않았다.

오래도록 옥천 미용실의 호황기를 상징하는 염미용실 역사의 시작이었을까. 염순옥 원장과 함께 일하는 미용사들의 노력, 손님들의 호응에 힘입어 개업 2년여 만에 그 맞은편 자리, 10여 평가량의 상가로 이전한 염미용실은 이후 대호장(옥천읍 금구리) 안에 미용실 2호점을 내는 등 확장일로를 걷는다. 

어려웠던 시절을 넘긴 '사람'의 힘
 
 염미용실 염순옥(68) 원장
염미용실 염순옥(68) 원장월간 옥이네
 
염미용실이 지금의 자리로 이전한 것은 1992년 무렵. 대호장 안에 있던 분점과 본점을 합해 운영할 장소를 찾다 만나게 된 곳이다. 이곳에 간판을 새로 내걸면서 염미용실은 일생일대의 호황기를 맞이한다. 당시 미용 의자만 12개, 미용사가 10명으로 옥천에서도 가히 최대라 할 수 있는 규모였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했던가. 승승장구하던 염미용실도 한 번의 큰 어려움을 맞이하는데, 1999년 9월 23일 밤 누전으로 발생한 화재가 그것이다. 민족 대명절인 추석 바로 전날의 일이었다.

"직원들 다 고향 보내고 미용실 장비 코드를 다 뽑고 제일 마지막에 나왔어. 그때 또 우리 시어머님이 병환 중이라 병원에 계시다 명절 쇤다고 우리 집에 오셨을 때거든요. 근데 불이 난 거예요. 전부 다 탔어. 그 크던 에어컨, 온풍기가 다 타서 팔뚝만한 재로 남은 거야. 그때 정말 힘들었지요."

그래도 그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건 함께한 직원들 덕이다. 불이 났다는 소식에 고향으로 떠났던 직원들은 곧바로 옥천으로 복귀했고 약 한 달여, 미용실 복구 작업에 힘을 쏟았다. 미용실 영업을 하는 것도 아닌데, 내부 수리와 시설 정비를 하는 인부들의 밥을 해줘가며 미용실 재건에 팔을 걷어붙인 직원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핑 돈다.

"제가 인복이 참 많아요. 처음 미용 배우면서 만난 신라미용학원 원장님이 그랬고, 미용사 하면서 만난 선배들이 그랬고, 또 제가 데리고 있던 후배 미용사들이 그랬고요. 지금은 다들 옥천에서 자기 가게를 차려 운영하고 있거나 대전, 인천, 청주, 전국에서 미용 일을 하고 있어요. 스승의 날이면 꽃바구니나 축하 인사를 보내주는데 그것도 무척 고마운 일이지요. 사실 처음 가게를 차려 나간다고 할 땐 섭섭했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여기서 잘 배워 각자 영업장 꾸리고 있는 게 정말 대견하고 든든하고 고맙습니다." 

끝없는 배움과 성장, 그래서 이 일이 행복하지요
 
 그는 여전히 사각거리는 미용 가위 소리가 좋고 손님의 머리를 매만지는 게 즐겁다.
그는 여전히 사각거리는 미용 가위 소리가 좋고 손님의 머리를 매만지는 게 즐겁다.월간 옥이네
 
1990년대에만 해도 옥천에서 결혼하는 이들은 염미용실을 한 번은 거쳐 갈 수밖에 없었다. 신부 화장이나 혼주 화장은 물론 드레스와 턱시도 대여까지 도맡을 정도로 옥천 웨딩의 선두주자였기 때문이다. 미용 일을 하며 기른 '눈썰미'는 서울의 좋은 드레스 디자이너를 찾아내는 데도 한몫했고, 염미용실 한편의 드레스 옷장은 많은 신부들의 로망이 됐다. 옥천뿐 아니라 영동, 보은, 제천, 충주 등지에서도 염미용실로 신부 화장과 드레스를 맡기러 올 정도였으니.

"다른 예식장에서 드레스를 예약했다가도 우리 드레스가 예쁘니 위약금을 물고 오는 신부도 많았어요. 그때만 해도 지퍼로 가봉을 했는데 우리는 끈으로 조절하는 드레스여서 훨씬 더 맞춤형처럼 입을 수 있었고요."

옥천 웨딩드레스계(?)까지 평정했던 염미용실이 드레스 대여업에서 완전히 손을 뗀 건 2000년대 초반. 빠르게 변화하는 유행을 따라가기 어려워지면서, 보다 본업에 집중하겠다는 결심에서다. 대신 언제나 배우는 자세를 잊지 않는 염순옥 원장의 열정은 여전히 식지 않고 있다.

"예전에 CACF(프랑스미용예술원) 한국지부에서 여러 미용 기술 세미나를 했어요. 그러면 일 마치고 가는 거지, 하나라도 더 배우러. 밤늦게 갔다가 새벽에 돌아와서 다시 미용실 출근하면, 우리 직원들이 쫓아와서 뭐 배우고 왔는지 궁금해 해. 그러면 또 둘러서서 알려주고 배우고 그러면서 일을 했지요. 지금은 유튜브니 뭐니 자료도 많고 배울 곳도 많잖아요? 그때는 그런 게 아니었으니 더 열심히 배울 수밖에 없었어.

지금도 그래요. 안주하는 사람이 되면 안 돼요. 제가 자주 하는 얘기가 '몸은 늙어도 기술은 늙지 마라' 거든요. 기술은 늘 새로워야 하잖아요. 내가 배운 걸 현장에서 당장 다 써 먹지 않더라도 일단 배우는 게 맞다고. 나는 그래서 내 인생에 미용을 만난 게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는 일이잖아."

처음 미용을 시작할 때만 해도 예순쯤 되면 일을 쉬지 않을까 생각했더랬다. 그런데 일흔을 바라보는 지금도 여전히 미용 가위를 손에 쥐고 있다.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저 그것이 자신의 기쁨이므로. 일이라서가 아니라, 자신의 특기이자 취미이며 인생이므로. 그래서 그는 그의 나이를 걱정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외친다.

"걱정 마셔요, 앞으로 10년은 더 거뜬합니다!"

월간 옥이네 통권 69호 (2023년 3월호)
글·사진 박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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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옥이네 #옥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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