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의 미용사(史)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곳이 있다. 옥천읍 금구리 가장 번화한 상권에 위치한 '염미용실'이다.
월간 옥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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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가위가 아니다, 돈도 빽도 없던 그녀의 자부심 https://omn.kr/237ms
충북 청주 미용사이던 그가 옥천 미용사가 된 과정에는 약간의 사고(?)도 있었다. 1977년 10월 3일, 그는 이 날짜를 잊을 수가 없다. 사고(!)와도 같은 운명(!)의 날이기 때문이다.
"미용 일을 하다 보니 아무래도 유행에 민감할 수밖에 없잖아요. 청주에서 일하며 유행을 읽는다고 나름 노력했는데, 손님들이 '아가씨는 대전 가서 배워봐도 좋겠다'고 그래. 청주보다 대전이 더 크고 미용업도 더 호황이었거든요. 그 길로 대전 은행동으로 갔지요. 그때만 해도 미용용품, 약제 취급하는 재료상이 미용실 취업도 연계해줬어요. 거기 사장님이 '대전시 옥천동에 갈만한 미용실이 있다'대. 딱 한 달만 봐주면 된다고, 한번 가보라고."
그가 '대전시 옥천동'으로 알고 온 곳은 이제 막 소도시 가꾸기 사업이 시작되는, 1~2층짜리 낮은 건물이 오밀조밀 모인 작은 농촌 '충북 옥천군 옥천읍'이었다. "속았구나" 싶었지만 막상 옥천 미용실 원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일을 안 해줄 수가 없더"란다. 그때 일했던 곳이 지금은 사라진 '오고파 미용실'이다. 염순옥 원장을 비롯해 백미용실 원장 등을 배출한 곳이니 옥천 미용사에서도 빠질 수 없는 역사적 장소.
"한 달만 일해주기로 하고 시작했는데, 그게 정이 들어서 몇 년을 있었던 거예요(웃음). 연고도 없는 곳에서 배짱도 좋았지. 그때만 해도 젊고 도전 정신이 번쩍였어요. 이제 겨우 22살이었던 걸요."
결혼 생각이 없던 그가 이곳에 와 일하며 남편(이성세씨)을 만나 백년가약을 맺기도 했으니, 여러모로 인생의 전환점이 된 '대전시 옥천동 미용실' 사건이다.
염미용실의 전성기
그렇게 옥천에 온 뒤 계속 오고파 미용실에서 일했던 그는 1981년 결혼과 함께 잠시 미용 일을 쉬게 된다. 하지만 이는 정말 '잠시'였다. 곧 첫째 아들을 배 속에 품은 상태에서 자신만의 미용실을 개업하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는 '염미용실' 상호와 관련한 일화도 하나 있다.
"그때만 해도 미용실을 하려면 결핵 검사를 해야 했어요. 보건소에 가서 엑스레이를 촬영해야 하는데, 임신했다고 하니 배를 가릴 수 있는 무겁고 두꺼운 치마 같은 걸 주더라고. 그걸 배에 두르고 엑스레이를 찍는데, 위생계 계장님이 가게 이름은 지었냐고 묻대. 등록하려면 상호가 필요하니까. 아직 못 지었다고 하니, 그러면 성씨를 따서 '염미용실'로 하래. '다음에 바꾸세요' 그러더라고. 근데 그걸 안 바꾸고 계속 쓴 거지."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군청 위생계 '육 계장님'은 이후 염순옥 원장을 만날 때마다 "미용실 이름 제가 지어드렸습니다"는 농을 던지곤 했다고.
그렇게 열게 된 미용실은, 염순옥 원장의 천직이라곤 하지만 만삭의 몸이 감당하기엔 힘이 들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제대로 된 시설 마련이 문제였다. 일단 가게 자리를 얻고 이름도 정했는데, 미용시설을 채워 넣기엔 돈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당시 가정 형편상 그가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터라 주변에 손 벌릴 곳도 없었다. 그러던 때 마치 구세주처럼 등장한 이가 있으니 바로 대전 재료상 '대성사' 사장이었다. 염순옥 원장에게 '대전시 옥천동 미용실'을 소개한 이다.
"가게는 얻어 놨는데 시설은 없고... 대성사 사장님을 찾아가서 한탄을 했는데, 그 사장님이 그러셔. '자네 옥천사람 만든 게 나이니, 내가 도와야지.' 정말 미용실 기자재 하나부터 열까지 다 해주셨어요. 그러면서 10년 후에 갚으라고... 눈물 나게 고맙죠. 10년 후에 갚으라셨지만, 그게 어디 그래요? 그분도 장사하는 분이니, 저도 힘닿는 대로 최대한 빨리 갚았어요. 그 와중에 나도 배짱도 좋지, 직원을 둘이나 구해서 개업을 했으니(웃음)."
옥천읍 금구리 7-11, 현재 백미용실 자리에 3~4평 남짓한 규모로 문을 연 염미용실은 의자를 단 3개 놓고도 통로가 좁아 간신히 걸어 다녀야 했을 정도로 작은 공간이었다. 그럼에도 손님은 끊이지 않았다.
오래도록 옥천 미용실의 호황기를 상징하는 염미용실 역사의 시작이었을까. 염순옥 원장과 함께 일하는 미용사들의 노력, 손님들의 호응에 힘입어 개업 2년여 만에 그 맞은편 자리, 10여 평가량의 상가로 이전한 염미용실은 이후 대호장(옥천읍 금구리) 안에 미용실 2호점을 내는 등 확장일로를 걷는다.
어려웠던 시절을 넘긴 '사람'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