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OO 학생 수업 장면.
이상자
늘 바쁘지만 마을까지 찾아와 한글을 가르쳐 준다니 열일 제치고 배우러 오는 것이다. 수업이 있는 날엔 꼭두새벽부터 일을 한다. 공부하는 2시간 만큼의 일을 미리 해놓고 오는 것이다.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장OO 학생이 숙제를 내놓으며 말했다.
"선생님, 저 눈 안 보여서 학교 그만 댕길려구유. 이게 마지막 숙제유."
한쪽 눈은 이미 실명했고 한쪽 눈은 몇 년 전에 수술했는데 점차 보이지 않아 고생했다. 불편하게 지내던 중 지난해 아들이 외국에서 인공 눈을 주문해 수술했는데 흐릿하게 보여서 늘 불편해 하셨다. '마지막'이란 말을 들으니 훅 서글픔이 밀려왔다. 가슴은 또 왜 그리 아파 오는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집에 혼자 계시면 외롭고 우울하시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나오셔요. 글씨 쓰지 말고, 숙제도 하지 마셔요. 그냥 제가 설명하는 말만 들으세요."
커다란 집에 남편도 없이 혼자 생활하는 분이다. 눈이 안 보이는 것처럼 답답한 게 어디 있으랴.
"남들 공부하는 것 보면 하구 싶어유. 쓰기도 허고 읽기도 허고. 남들 쓸 때 나두 쓰야는디 뭇허니깨 속상해서 그만 둘래유."
함께 공부하는 학생들이 그냥 와 앉아서 듣기나 하라고, 혼자 집에 있으면 우울증 걸린다고 다들 한 마디씩 말했다. 걷는 것은 지장 없지만 읽기와 쓰기를 하려면 잘 보이지 않아서 못 하겠다는 것이다. 마음이 시렸다.
장OO 학생은 이런 상황에도 밭농사를 짓는다. 아들이 와서 거들어 주니까 고추, 상추, 가지, 참외, 김장배추, 김장 무, 쪽파 등등 모든 야채는 자급자족한다. 이곳에서 평생 농사를 지으신 분이라 당신도 먹기 위함이지만 객지 사는 자식들에게 주기 위해 심는다.
순간, 공부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이 학생이 공부 시간에 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나는 가끔 두 번째 시간에 그림을 그리게 했었다. 그날은 한복을 입은 여자 그림 도안이었다.
색을 고를 때, 내가 오매불망 입고 싶었지만 입지 못했던 색깔의 옷이나, 내가 아끼며 입었던 한복의 색, 아니면 지금 입고 싶은 색을 칠해 보라 했다. 그림이 완성된 후 칠판에 그림을 자석으로 붙여놓고 그 옷에 얽힌 이야기를 해보도록 했다. 거의 과거에 입었던 옷의 색깔을 칠했다. 장OO 학생 차례가 되었다.
"난 결혼식 올리고 저렇게 차려입고 자향(재행)을 갔어유. 자향 갔다 올 때 우리 신랑이 시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영화 구경을 시켜줬슈. 참 좋았슈. 색칠을 하면서 그때 생각이 나서 너무 좋았슈. 그때가 엊그제 같은디."
짧은 시간 옛날을 회상하며 그립고 애틋한 추억을 소환해 행복해 하던 모습이 섬광처럼 스쳤다. 그 시절에 시골에서 결혼식 후 재행(혼례를 올린 후 신랑신부가 처음으로 신부의 본가에 가는 것)을 다녀와 영화 관람을 시켜줄 정도의 신랑은 극히 드문 일이다. 그 말에 다른 학생들이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수업 시간마다 행복해하는 모습을 볼 수 없게 된다니 가슴이 먹먹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