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판결문 표지부 (김거성 대 대한민국)
김거성
- 대학 2학년 때인 1977년에 구속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당시 어떤 사유로 기소가 되었나?
"대학 친구인 노영민(전 문재인 대통령 비서실장)과 내가 연세대 재학중이던 1977년 10월 12일 예배를 마친 학생들에게 '구국선언서'를 배포하고 낭독했다. 이 일로 이른바 '대통령긴급조치 제9호 위반'으로 구속·기소되어 감옥살이를 했다.
박정희 독재정권 말기였던 당시 긴급조치 제9호의 주요 내용은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거나 사실을 왜곡해 전파하는 행위, 집회·시위 또는 신문, 방송, 통신 등 공중전파수단이나 문서, 도화, 음반 등 표현물에 의해 대한민국헌법을 부정·반대·왜곡 또는 비방하거나 그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청원·선동 또는 선전하는 행위, 학생의 집회·시위 또는 정치관여행위 및 이 조치를 공연히 비방하는 행위 일체를 금하고, 그런 내용을 전파하거나, 표현물을 제작·배포·판매·소지 또는 전시하는 행위를 금하며, 이를 위반한 자는 1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고,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등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노영민이 제작해 와서 내가 함께 배포한 구국선언서에는 '국민의 피와 살을 깎아낸 세금을 독재정권의 유지를 위해 외국 정치인을 매수한 박동선 사건은 웬 말인가? 인간으로서 양보할 수 없는 기본권을 무시하고 소수 지배계급을 위한 긴급조치는 또 웬 말인가? 정보정치의 주역 중앙정보부 해체를 위해 싸운다. 이 모든 비정의의 온상 유신헌법의 철폐를 위해 싸운다'는 등의 내용이 있었다. 당연히 긴급조치 제9호 위반이 되었다.
또 '언제부터 우리 학원이 형사들의 안식처가 되었고, 그들이 주인이 되었던가, 아! 통탄한다'라는 부분까지 '허위사실을 날조'한 것이라며 검찰에서 우리를 긴급조치 제9호 위반으로 구속·기소했다. 나중에 보니 1심 판결문에서 허위사실 날조 부분은 빼버렸다.
2014년 5월 재심에서 우리는 이와 관련해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당시 재판장의 '피고인들은 무죄, 우리나라 사법부는 유죄'라는 말을 듣고 나와서 지하철역에서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이 소식을 전하며 울먹였던 생각이 난다."
- 당시 얼마나 복역했나? 또 어떤 사연으로 서울구치소 내에서의 사건으로 추가 기소가 되었나?
"검찰은 1심에서 노영민에게는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 소년수였던 내게는 징역 단기 4년, 장기 5년, 자격정지 5년을 구형했다. 최종 확정된 형량은 노영민 3년, 김거성 1년 6월이었다. 그런데 당시 서대문에 있던 서울구치소 안에서 나는 3.1절, 4.19 등에 '유신헌법 철폐하라, 긴급조치 해제하라, 노동자 인권 보장하라, 학원사찰 중지하라, 언론탄압 중지하라, 민주헌정 회복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그래서 구치소 내에서 추가 기소되었다.
1979년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방한해 인권 문제를 거론한 결과 당시 기결수였던 '주범' 노영민은 제헌절 특사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 시점에 나는 형기는 다 마쳤고 다시 미결수인 상황이어서 한 달쯤 더 살고 광복절에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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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수사관들로부터 가혹행위와 고문을 받은 것으로 아는데 역사적 기록을 위해 수사관들의 가혹행위에 대해 좀 말씀해 주실 수 있는지?
"경찰에 잡혀가서 사실을 있는 대로 진술했기에 따로 고문을 당할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국가 폭력집단은 내 소신을 비하하고 폭력으로 짓밟았다.
경찰에서 조사를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할 말을 묻기에 '내 친척, 내 재물, 내 명예, 내 생명 다 빼앗긴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라는 찬송가를 불렀다. 그런데 씩씩거리며 한참동안 뺨을 때리고 주먹질을 했다.
다 시인했으니 검찰에서야 무사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황○구 검사는 내가 '천부의 인권으로서 저항권'에 대해 언급하자 욕설을 퍼부으며 신고 있던 슬리퍼를 벗어 머리를 마구 때렸다.
구치소에서 '유신헌법 철폐, 긴급조치 해제' 등 구호를 외치면 포승으로 묶고 방성구(말을 하지 못하도록 사람의 입에 물리는 도구)를 채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한 번은 교도관 몰래 다른 동료로부터 옥중 선언문을 받아와 영어사전 빈곳에 적어 두었는데, 방 검사에서 이를 찾아내어 '도서열독금지' 2월이라는 징벌을 받았다.
같은 방에 있던 동료 재소자 한 사람을 시켜 일거수일투족 감시하게 해서 그의 밀고로 드러난 일이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옆과 앞의 방을 모두 공실로 두었다. 읽을거리란 오직 벽에 붙어 있던 '국민교육헌장' 하나여서 그것으로 수화를 연습했다. 밥을 물에 말아서 콩 숫자를 세는 것이 일과여서 덕분에 젓가락질을 새로 배울 수 있었다.
징벌 기간이 끝나 책을 한 권 먼저 가져가라고 해서 공동번역 성서를 들고 방에 와서 펼쳤는데, 베드로전서 4장이 눈에 들어왔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여러분을 시험하려는 것이니 무슨 큰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니, 오히려 기뻐하십시오.'(베드로전서 4: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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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에는 또 어떻게 체포된 것인지?
"80년 광주항쟁 직후였다. 2학기 개강 첫날 학교에 뿌려진 5.18 관련 유인물의 범인을 찾아내라는 것이었다. 후배들을 족치니 선배들 이름이 나왔다. 사실 유인물은 내가 담당하겠다고 친구들과 역할 분담은 했지만 실행하기 전이었다. 아직까지도 그 유인물을 누가 제작해서 뿌렸는지는 모른다.
독립문 근처에서 형사들에게 잡혀와 서대문경찰서 별관 외사과(지금 경찰청 본청 자리) 공간에서 옷 모두 벗겨지고, 입고 있던 속옷으로 눈을 가린 채 '엎드려뻗쳐', 무한대로 '팔굽혀 펴기'를 해야 했다. 한계에 다다르자 그때부터 몽둥이질, 발길질, 주먹질... '여기가 어딘지 알아? 남민전 이재문이 달았던 자리야.'(관련기사:
위암으로 고통받는 사람까지 고문한 이근안 https://omn.kr/1nft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