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지원 회원
박상환
지난 5월 15일 일본 교토부 우지시 우토로 51번지에 노래가 날아갔다. 참여연대 회원 노래모임 '참좋다'가 지난해 4월 22일 문을 연 '우토로 평화기념관'(이하 기념관) 개관 1주년을 축하하는 공연을 한 것이다. 배지원 회원이 그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그는 우토로국제대책회의 사무국장 등을 지내며 2005년부터 2018년까지 14년간 우토로 주민의 거주권 문제를 해결하고 기념관 건립 활동을 했다. 건강상의 문제로 활동을 중단한 뒤 5년여 만에 다시 우토로를 찾은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감격의 순간을 나누고자 그를 만났다.
– 참좋다의 첫 해외 공연을 기획하셨네요.
"기획이란 말은 거창해요. 참좋다는 본업이 있는 참여연대 회원들이 금요일 저녁마다 모여서 주로 민중가요를 부르는 모임입니다. 노랫말이 너무 좋아서 우토로 주민들, 그리고 제가 함께 활동했던 동지들에게도 들려주고 싶더라고요. 지난해 늦가을쯤 참좋다 뒤풀이 때 슬쩍 말했죠. "코로나 상황도 끝나가는데 우토로에서 노래하는 건 어떨까?" 사비도 들고 시간도 내야 해서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그런데 다들 정말 흔쾌히 마음을 모아줬어요. 정말 감사한 일이죠. 제가 한 거라곤 '슬쩍 흘리기'와 '우토로 마을로부터 공연 승낙 받기'가 다예요."
– 공연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궁금합니다.
"원래 예정된 행사는 아닌데 우토로 주민들이 특별히 문화제를 꾸려줬죠. 우토로 농악대의 공연, 일본인 자원봉사자들의 오카리나 연주, 이웃 주민 일본 어르신들의 클래식 협주가 이어졌고 참좋다는 특별 게스트로 마지막에 공연했어요. 비가 많이 왔지만 100명이 넘는 재일동포·일본인·한국인 관객이 어우러졌어요. 눈시울을 붉히다가 어깨를 덩실거리다가 노래하다가… 가슴 벅찬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노래하게 해줘서 고맙고 우토로 주민들은 우리가 와줘서 고맙고. 그동안 우토로에서는 외부에서 지원해주시는 분들에게 야끼니꾸
1) *(하단 설명 참조)를 대접하는 모임도 있고 이런저런 잔치도 많았지만, 주민들이 이렇게 근심 없이 온전히 즐기는 시간은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이제 기념관도 운영이 잘 되고 모든 숙제가 끝났잖아요."
– 공연에서는 어떤 노래를 불렀나요?
"다섯 곡을 불렀는데, 첫 곡은 '내 눈물에 고인 하늘'
2) *(하단 설명 참조)이었어요. 1941년 군사용 비행장 건설을 위해 일제가 동원한 조선인 노동자들이 모인 마을이 우토로잖아요. 이후에 일본 사기업에 토지 소유권이 넘어가고 주민들은 한일 양국 정부로부터 외면당한 채 강제퇴거에 맞서 맨몸으로 우토로를 지켜냈죠. 2004년 한국을 향해 도움을 호소해 모금 운동이 시작되고 2007년 토지매입이 이뤄졌지만, 2018년에야 1차 공영주택이 완공되었어요. 수십 년 고단하게 싸움만 하시다가 공영주택에 입주하지 못하고 돌아가신 분들, 기념관 건립을 위해 애쓰다 정작 기념관은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분들도 많습니다.
이 노래로 한 분 한 분에 대한 그리움과 감사를 전하고 싶었어요. 제가 그분들 이름을 부르며 곡 소개를 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울 것 같더라고요. 김수환 기념관 부관장이 대신 읽어주었는데, 결국 그도 울고 저도 울고 객석에서도 훌쩍였어요. 그 외에도 동포들과 일본인들도 많이 아는 노래 '임진강'과 일본 노래 '날개를 주세요
翼をください 3) *(하단 설명 참조)'도 불렀어요. 아카펠라 연습하랴, 일본어 가사 외우랴, 준비 과정이 쉽진 않았어요."
– 우토로 운동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90년대 말 일본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했는데, 아르바이트로 재일조선인들을 인터뷰하고 기사를 썼어요.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조선학교에 가거나 또 누군가는 정말 목숨을 던지는 현실을 그때 알게 됐어요. 이들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늘 했어요. 귀국 후 2004년 우토로 주민들이 도움을 호소하는 라디오 방송을 듣고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고 2005년 2월 제가 활동하던 지구촌동포연대 동료들과 함께 우토로 현지 실태조사를 시작했습니다."
– 토지 매입을 위한 모금은 당시로서는 꽤 새로운 접근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토로 운동은 조율과 협의가 중요했어요. 우토로 주민들, 일본 운동가들, 재일동포 활동가들, 한국 시민이라는 네 개 주체가 함께 했거든요. 일본 정부가 마을정비사업을 하려 해도 우토로 땅이 기업 소유라서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모금으로 토지를 매입하자고 했죠. 당시 일본 사회에 없었던 운동방식이라 의견을 모으는 과정이 참 어려웠어요. 하지만 우토로 주민과 재일동포 활동가들의 간절한 의지, 민주화를 경험한 한국 시민의 열기가 운동을 견인했다고 봅니다."
–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였고, 이를 견딘 힘은 무엇이었나요?
"토지문제를 해결한 뒤 기념관 건립 운동을 시작하는 게 힘들었어요. 운동 초기부터 구상한 일인데 막상 현실이 되자 우려의 목소리가 컸습니다. 청산되지 않은 일본 가해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이들도 있었고, 누구의 관점으로 역사를 전시할지에 대한 견해 차이, 그리고 운영과 재정에 대한 걱정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거주권 투쟁이 일단락한 시점에서 새로운 운동 동력을 만드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포기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함께 해 온 지구촌동포연대 동지들, 열정적으로 버텨준 재일동포 운동가들이 있었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습니다."
– 한일 사이에서 오랫동안 활동하셨기에 묻고 싶습니다. 일본의 일부 '혐한 정서'와 한국의 일부 '반일 정서'가 공존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일본 정부나 사회에 대해 할 말은 해야겠지만, 한국 사회에 대한 자성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22년 우토로에서 일본 청년이 조선인이 싫다고 방화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를 비판하고 재발 방지를 요구하는 것과 동시에 '우리는 어떤가.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토대, 이를테면 차별금지법은 있는가' 등을 돌아봐야죠. 우토로 문제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의 민주화 성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권과 민주주의 수준이 높아야 일본은 물론 국제 사회도 우리가 바라는 한일 관계를 수긍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