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민주항쟁 당시 시위대가 부산시내를 향해 나선 옛 정문 옆 무지개다리 모습.
서부원
사실 현대사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는 이들조차 부마항쟁은 왠지 낯설어한다. 학계에선 해방 후 우리나라 4대 민주화운동의 하나로 우뚝하지만, 일반인들에겐 나머지 셋에 견줘 존재감이 미미한 실정이다. 참고로, 4대 민주화운동이란 시대순으로 4.19 혁명,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을 일컫는다.
1979년 10월 16일~20일 부산-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벌어진 반 독재 시위사건인 부마항쟁. 부마항쟁은 '겨울 공화국'으로 불리던 엄혹한 유신 정권을 끝장낸 직접적 계기였다. 그해 10월 16일 '유신 철폐'와 '독재 타도'를 외친 부산대학생 시위를 시작으로 시민이 합세하고, 이틀 뒤인 18일 이웃한 마산으로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유신 정권은 계엄령과 위수령을 동원해 억눌렀다.
대학생들의 단순한 데모가 아니라 자발적 시민 항쟁으로 비화한 실상을 직접 목격한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선무가 필요함을 역설했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시민을 향한 발포를 거론하며 그의 건의를 묵살했다. 직후 김재규는 박정희를 저격하며 유신 정권은 종말을 맞는다. 부마항쟁이 시작된 지 꼭 열흘 만인 10월 26일의 일이다.
김재규의 증언 등을 토대로 당시 부산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이는 5.18 광주의 그것과 완벽한 데칼코마니다. 부산에 비상계엄이 선포된 것부터 시위대의 모습, 주변 상황 등이 데자뷔처럼 똑같다. 시민들은 시위대에 주먹밥과 음료수를 나눠주고, 학생들이 군인에 쫓기면 자기 집에 숨겨주었다. 시위대와 시민이 완전히 의기투합한 상태였다.
투입된 계엄군의 무자비한 시위 진압 모습도 같았다. 그들은 시위대를 향해 곤봉과 군홧발 세례를 퍼부었고, 개머리판을 이용해 무차별 폭행을 가했다. 총 끝에 대검을 꽂아 시민을 위협하기도 했다. 와중에 마산에선, 길 가던 시민 한 명이 계엄군의 폭력에 숨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당시 정부는 부검까지 해놓고선 보름이 지나 유족에게 알리는 만행마저 서슴지 않았다.
부마항쟁 때 시위의 강경 진압을 주도했던 제3공수 특전여단은 7개월 뒤 광주로 건너가 시민에게 총부리를 겨눴다. 당시 유혈 진압에 앞장선 제3공수 특전여단의 잔혹함은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광주시민들을 몸서리치게 하고 있다. 그들에게 부마항쟁은 '연습'이었고, 5.18 광주는 '실전'이었던 셈이다.
부마항쟁이 없었다면 유신 정권은 존속되었을 테고, 느닷없는 신군부의 등장과 5.18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호오를 떠나 해방 후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 박정희라고 한다면, 부마항쟁은 현대사의 변곡점으로서 기념비적 사건이다. 부산을 '야도(野都)'라고 칭하는 것도, 거슬러 오르면 부마항쟁에 닿아 있다.
지난 2005년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진실화해위)'가 출범하면서 부마항쟁에 대한 진상규명 작업이 시작됐다.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에만 10년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 그마저도 5.16 군사쿠데타를 찬양해온 이들이 진상규명위원으로 위촉되는 등 어처구니없는 혼선이 빚어졌다.
32년 만의 한풀이, 그러나
정부가 부마항쟁 당시 진압 과정에서 희생된 첫 공식 사망자를 인정한 건, 특별법이 제정된 지 5년 뒤인 지난 2018년의 일이다. 그는 마산에서 길 가다 곤봉에 맞아 숨진 고 유치진씨로, 무려 32년이 지나서야 억울함을 벗었다. 만시지탄이지만, 32년 만에 그를 기리는 추모제가 열려 부마항쟁의 역사적 의의를 다시금 되새기게 했다.
2019년 정부는 부마항쟁이 시작된 10월 16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 당시 마산 경남대학교에서 열린 제40주년 기념식은 정부가 처음으로 주관한 행사로,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 그 뜻을 기렸다. 이후 부산과 마산 등지에서는 관련 음악회와 공연, 학술 토론회, 시민 강좌 등이 줄을 이었다. 바야흐로 부마항쟁의 '봄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