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동문안길철종의 사저였던 곳에 들어 선 용흥궁. 궁의 담벽을 타고 간 동문안길이 고즈넉하다.
이영천
이런 영향으로 강화읍은 오랜 기간 답보 상태에 머물러야 했다. 하지만 이게 마냥 답보와 쇠락일 뿐일까. 규제에 묶인 건축 행위 제한이 이제 값진 자산으로 변모하는 중이다. 도시재생의 흔적과 성과가 곳곳에서 배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주말이면 복고 감성을 찾는 많은 인파로 붐비는 도시가 되었다.
재생하는 도시 공간
도시재생의 핵심은, 무엇보다 발길을 끌어들일 요인을 제공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강화읍은 도시재생의 이러한 핵심에 한 발짝 다가선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다. 그것도 관(官)이 아닌, 한 사업가의 기지와 창의가 빚어낸 성과다. 누가 주체인들, 결국 도시재생은 창의성에 달려 있다는 걸 증명한 셈이다.
강화읍은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전후, 우리나라 섬유산업의 메카였다. 강화읍에만 60여 개 크고 작은 공장과 공방이 있었고, 4천 명 이상이 종사했다. 1970년대 밀려든 값싼 나일론으로 쇠락의 길을 걷는다.
대구를 중심으로 대규모 현대식 섬유 공장이 들어서고, 화학섬유가 유행하면서부터다. 경쟁력 잃은 강화 직물 산업은 부득이 문을 닫아야 했다. 노동자와 공장이 하나둘 섬을 떠났다. 현재는 가내 수공업 형태의 몇 곳만이 명맥을 잇고 있을 뿐이다.
방직기 소리 요란하던 공장들이 제 기능을 잃고, 발길 끊긴 적막의 시공간에 갇혀 버렸다. 몇은 폐가처럼 방치되었고, 몇은 건물 일부만 남아 번성하던 옛날을 회상할 뿐이었다. 이렇게 방치되던 공장 중 하나가 공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으며,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조양방직이 새로운 공간으로 탄생하면서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