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도 바람의 언덕에 있는 라벤더 정원. 맞은편에 보이는 섬이 안좌도.
임동수
퍼플교가 생기기 전에는 세 개의 섬을 잇는 노두길이 있었다. 바닷물이 빠져 갯벌이 드러나는 썰물 때만 통행이 가능했다. 물이 차면 노두길은 바닷속으로 사라지고 배로 건널 수밖에 없었다.
1950년대부터 목포와 박지도, 반월도를 왕래하던 여객선은 배의 속도가 느리고 이곳저곳 중간 기착해 하루에 편도만 가능했다. 여객선이 두리 선착장 인근에 오면 승객들은 종선(從船)으로 갈아타고 선착장에 내렸다. 풍랑이 일면 배가 끊겼다.
군수가 박지도 마을을 찾았을 때 토박이 할머니들에게 소원을 물었더니 김매금 할머니가 "배를 타지 않고 걸어서 섬 밖으로 나가보고 싶다. 목포까지 걸어서 가고 싶다"고 말했다. 퍼플교와 천사대교 개통으로 배를 타지 않고 목포까지 가보는 할머니들의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뜻에서 퍼플교는 '천사의 다리'라고도 불린다.
비련의 중노두 전설
바닷물이 빠져나가면 반월도와 박지도 사이에 갯벌이 드러난다. 중노두는 박지도와 반월도 사이에 놓인 노두길이다. 스님과 비구니의 슬프고 아름다운 전설이 서려 있다.
박지도의 절에는 젊은 남자 스님이, 반월도의 절에는 비구니가 살았다. 박지도의 스님이 반월도의 비구니를 사모했지만 바다에 가로막혀 오갈 수가 없었다. 스님은 망태에 돌을 담아와 갯벌 위에 징검다리를 놓기 시작했다. 밀물에는 건널 수 없지만 물이 빠지는 썰물 때면 건널 수 있는 노두교였다. 반월의 비구니도 맞은편에서 노두길 공사를 시작해 돌을 날랐다.
오랜 세월이 흘러 중노두가 완성되던 날 두 사람은 노두 한가운데서 만나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평생 그리움이 사무쳐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부둥켜안고 있다가 밀물이 들어오는 줄도 몰랐다. 그러다 썰물이 시작돼 노두돌이 물에 잠기면서 되돌아갈 수 없게 됐다. 둘은 한 몸이 되어 파도에 휩쓸려 나갔다. 평생의 기다림 끝에 활짝 타오른 비련(悲戀)의 불꽃 만남이었다.
박지도 해안 산책로를 걷다 보면 이 노두길을 볼 수 있다. 밀물이 들어오면 돌의 머리만 살짝 보이지만 썰물 때는 중노두의 원형이 드러난다. 박지도는 반월도에 비해 농토가 넓고 비옥해 주민들이 어업보다는 농업에 더 많이 종사했다. 안좌도 출신인 김환기 화백의 부친 김상현은 천석꾼 대지주였다.
김 화백은 아버지의 부에 힘입어 일본 유학을 가고 예술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 1916년 작성된 지적원도에 는 58필지가 김상현 소유의 땅으로 올라 있다. 천석꾼 땅을 밟지 않고서는 박지도를 지나갈 수 없었다. 김상현의 박지도 마름 장인평은 백마를 타고 다녔으며 박지도에서 제일 큰 7칸 집에 살았다. 1932년에 지어진 7칸 집은 폐가가 됐지만 돌담은 그대로 남아 있다.
반월도와 박지도는 1km 떨어진 형제섬. 반달 모양으로 생긴 반월도가 형이다. 반월도와 박지도는 섬 둘레에 아름다운 바다를 따라 해안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반월도는 면적이 넓고 어깨산이라 불리는 주봉(210m)이 박지도 당산(130m)보다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