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포와 진주 사이에 자동차를 운행했던 삼진자동차가 개통에 즈음해 기념 촬영한 사진. 1910년대 중반쯤으로 추정된다. 사진=사천시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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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포에 기선이 처음 운항하기는 1905년의 일이다. 일본인이 삼천포 출입 본격화한 것도 이 무렵일 것으로 짐작한다. 다만 <사천시사> 등에서 삼천포의 개항 시점을 1906년으로 보는 데는 일본인 사업가 오노 이쿠지(대야육이·大野育二)의 영향이 큰 듯하다. '경남의 자동차왕'이라는 별명을 지닌 오노 이쿠지는 그해 10월에 선박 운송 업체인 '오노(대야)회조부'를 삼천포에 설립했고, 이때부터 일본인이 삼천포에 눌러앉기 시작했다.
1907년에 68명이던 삼천포(옛 수남면·문선면으로 제한)의 일본인 거주 인구는 이듬해인 1908년에는 100명을 넘어섰다. 일부 일본 어민들이 정부나 지자체의 도움 없이 임의로 이주해 오면서다. 이해 5월에 일본인회가 조직된 데 이어 11월에는 일본인 소학교가 들어섰다. 1910년과 1911년에 일본 오이타(大分)현과 에히메(愛媛)현 어민들이 신수도와 팔포에 각각 이주해 오면서 1911년의 삼천포 거주 일본인은 109호에 444명으로 늘었다.
삼천포에서 일본인 증가는 전체 인구 증가로 이어졌다. 1907년에 5730명이던 삼천포 인구는 1910년에 7532명에 이르렀다. 이를 두고 <사천시사>에서는 '개항 초기와 비교해 두 배 가까이 늘었으며, 사천군 전체 인구의 약 30%를 차지한다'는 식으로 해설을 달고 있다.
이때의 사천군 전체 인구는 2만6837명이었다. 삼천포의 인구는 다시 1918년에 8249명, 1930년에 1만3898명으로 증가했다. 1930년의 삼천포 거주 일본인은 553명이었다. 이 시기에 사천군 전체 인구는 6만9101명이며, 이 가운데 한국인은 6만7579명, 일본인은 1467명, 그 외 56명이다. 1914년에 옛 곤양군이 사천군과 통합하면서 삼천포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이 낮아졌음을 알 수 있다.